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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일 바사연 공동대표 매일신문 대담기사

"퇴계는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존경 받았다, 그게 선비다"

바른사회운동연합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병일 바른사회운동연합 공동대표(사진)가 제7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와 가진 대담이 매일신문에 보도되었기를 이를 게재합니다.
 
[김병준의 대담]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퇴계는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존경 받았다, 그게 선비다"
 
1945년 상주 출신이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행정고시를 거쳐 경제부처에서 30여 년을 일했다.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차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그리고 참여정부에서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냈다.
 
잘나가는 기업의 명예회장이나 고문, 아니면 고액 연봉을 받는 대형 법무법인 고문쯤으로 있을 법한 경력이다. 그러나 장관직을 그만둔 후 그가 뛰어든 것은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일과 달리기, 즉 마라톤이었다. 지금 있는 곳도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곳의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국학연구와 선비문화 확산에 힘쓰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선비였다. '' 중의 ''인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내면서도 항상 겸손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 앞에서 할 말을 다 했다. 열과 성을, 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그런 자세였다.
 
<퇴계처럼><선비처럼>의 저자이기도 한 그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만났다.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그에게 무엇이 그를 이리 이끌었는지를 물었다.
 
<"다른 일 뭐?">
 
김병준: 경제부처 장관을 하신 분이 이렇게 국학을 공부하고 선비문화를 확산하는 일을 하고 계시다. 그것도 서울 사시던 분이 안동까지 내려와서 말이다.
 
김병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김병준: 주변에서 반대하지 않았나?
 
김병일: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잘 이해해주고 있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김병준: 거의 안동에서 지내시는 것 같은데 숙소는 어디에 있나?
 
김병일: 관리인 숙소로 지은 방이 하나 있다.(작은 응접 소파와 작은 책상이 공간을 거의 다 채우다시피 한 이사회 방을 가리키며) 이 방의 3분의 2 정도 된다.
 
김병준: 좁아서 불편하겠다.
 
김병일: 넓어 무엇 하겠나. 퇴계 선생도 방과 부엌 각 한 칸, 마루 한 칸 반의 작은 집에서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사셨다.
 
김병준: 국학과 선비문화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김병일: 어릴 때부터 옛것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른들로부터 옛 풍습이나 문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 갈 때도 사학과 이외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석사학위도 조선왕조의 청백리 연구로 받았다.
 
김병준: 이곳 도산서원에도 자주 다녀갔겠다.
 
김병일: 대학 3학년 때 단체로 답사를 왔었다. 퇴계 선생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것 같은 나지막한 흙담 등이 아직도 머릿속에 있다. 안동댐이 들어선 이후에는 약국에 묶인 아내는 두고 4살짜리 딸을 데리고 다녀갔다. 아내를 두고 혼자 올 만큼 이미 내 마음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뒤로도 공무로 퇴계 선생 탄생 500주년 행사 등에 참석하는 등 여러 번 다녀갔다.
 
김병준: 우리 역사와 문화에 그만큼 관심이 컸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김병일: 관심은 컸다. 하지만 공무원 아니냐. 공직에 전념해야 했고, 그래서 마음껏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차관이 되고, 공직생활을 마무리할 때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모>, 즉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을 여러분들과 함께 만들기도 했다.
 
김병준: 어떤 분들과 같이하셨나?
 
김병일: 학술원 부회장을 지내신 이성무 선생, 독립기념관장을 지내신 이문원 선생, 이화여대 총장을 지내신 이배용 선생 등이 참여하셨다.
 
김병준: 대단한 역사학자들 아니냐? 그런 분들과 자리를 같이할 만큼 공부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아니냐?
 
김병일: 그렇지 않다. 주로 그분들 말씀을 들으며 배우는 입장이었다.
 
김병준: 아무튼 그 뒤 차관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하셨다. 하지만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거쳐 곧 다시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정부에 들어가셨다. 다시 공부하기가 힘들어졌겠다.
 
김병일: 욕심에 <뿌리회>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명현의 자손들이 자기 조상만 알고 지낼 게 아니라 남의 조상 공부도 좀 하자는 취지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막상 장관직을 그만둘 때까지는 잘 참석하지 못했다.
 
김병준: 장관을 그만둔 후에는 이쪽 공부에 몰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병일: 장관을 하면서 내내 마음에 둔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한문을 공부하는 게 그 하나였다. 그래서 장관을 그만둔 지 한 달 남짓 후 한문 서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3년 정도 4(四書), 즉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두 번 공부했다.
 
김병준: 또 하나는?
 
김병일: 달리기였다. 약한 몸을 고쳐 보겠다고 시작한 것이었는데, 장관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했다. 건강해야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각 언론사 마라톤과 뉴욕 마라톤 등 풀코스를 12번 뛰었다. 풀코스보다 긴 울트라도 두 번 뛰었다. 아내와 친구 부부까지 끌어들여 때로는 4커플 8명이 같이 뛰기도 했다.
 
김병준: 비슷한 경력을 가진 분들과는 너무도 다른 길로 가셨다. 주변에서 왜 그러고 있느냐고 하지 않던가?
 
김병일: 다른 일을 하라 하는데, 다른 일 뭐? 그냥 공부하고 달리고, 그렇게 사는 게 좋았다.
 
 
<다시 얻은 성찰의 기회>
 
김병준: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은 언제부터 맡게 되었나?
 
김병일: 2007년 처음 이야기가 나왔다. 잘 알지도 못하고 나이도 상대적으로 젊으니 5년 뒤에나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런데 약 1년 뒤 영하의 날씨에 새벽길을 걷다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정기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나도 이사라 참석을 해야 했지만, 다리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그런데 이 이사회에서 나를 이사장으로 선임해 버렸다.
 
김병준: 어쩔 수 없었겠다.
 
김병일: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뭘 알아야 이사장을 하지. 국학이 좋아 공부하는 것과 선비문화수련원을 운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니겠나.
 
김병준: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
 
김병일: 이사회에서는 일 년에 몇 번 이사회를 주재하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왕 맡았으면 제대로 해야지. 수시로 수련원에 내려와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고 퇴계 선생께서 걸었던 길을 걸으며 퇴계 선생과 선비문화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
 
김병준: 보지 못했던 것?
 
김병일: 선비로서의 퇴계 선생 모습이었다.
 
김병준: 이쯤에서 물어보고 가야겠다. 선비가 뭐고 선비정신이 뭔가? 양반이나 사대부를 말하는 건 아니지 않나?
 
김병일: 양반은 신분계급이다. 쉽게 말해 문반과 무반의 벼슬아치와 그 자손들이다. 사대부는 사()와 대부(大夫)를 합친 말로 벼슬아치를 말한다. 이에 비해 선비는 인격적인 개념이다. 지와 덕을 겸비하고, 의리와 범절을 지키며, 자신에 엄격하고 남에게는 후한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정신과 겸손의 자세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양반이고 사대부라 하여 다 선비가 아니다.
 
김병준: 우리가 잘 아는 분 중에 어떤 분을 선비라 할 수 있나?
 
김병일: 고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이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종교를 초월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적셨다. 또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병준: 퇴계 선생이 바로 그런 분 내지는 그 이상의 분이었다는 말씀 아니냐?
 
김병일: 그렇다. 선생은 그야말로 배운 대로 실천했다. 제자와 가족, 그리고 심지어 여자 종의 사정과 심정까지 헤아렸다.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그럼으로써 자기도 완성시키고 다른 사람도 완성시키고자 했다.
 
김병준: 쉽지 않은 일이다.
 
김병일: 그때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신분사회 아니었나. 게다가 남녀유별에 장유유서의 문화가 있었다. 양반에 남자, 게다가 임금님까지 못 모셔가 안달을 하는 큰 어른이었다. 말하자면 영원한 ''이었다. 그런 분이 영원한 '''여자' ''에게까지 잘하기가 쉽겠나?
 
김병준: 그런 일화가 많을 것 같다.
 
김병일: 끝이 없을 정도이다. 일례로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둘째 부인을 맞았는데 이분이 조금 부족한 분이었다. 제사상에 놓인 과일을 찍기도 하고, 흰옷을 붉은 천을 대어 꿰매기도 했다. 그런데도 선생은 이 부인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16년을 한결같이 받아들이고 감쌌다.
 
김병준: 후학들과 제자들에게도 끝없이 겸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병일: 고봉 기대승 선생과의 47(四端七情) 편지 논쟁을 봐라. 26살 아래인 고봉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엎드려 절한다'는 내용의 인사를 했다. 오죽하면 성호 이익 선생이 이곳에 와서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슴이 먹먹한데 그 당시 그 앞에서 배운 사람들은 어떠했을까"라고 했겠나.
 
김병준: 퇴계 선생을 큰 학자로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민망하다.
 
김병일: 선생뿐만 아니라 그 후손 중에도 그런 분이 많다. 선생의 14대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 시인의 삶이 그 예이다. 또 지금의 16대 종손도 팔순이 넘은 나이지만 수련생들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무릎을 꿇는다. 오히려 상대가 불편을 느낄까 신경을 쓰면서 말이다. 겸손이 몸에 익어 있다.
 
김병준: 이런 이야기와 일에 취해 이렇게 안동에 머물게 되셨나 보다.
 
김병일: 그런 점이 있다. 그동안 아내에게 어떻게 했지? 부하직원들에게는 어떻게 했지? 성찰의 기회를 갖는 게 좋았다. 그러면서 안동에 머무는 시간이 계속 늘어갔다. 게다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을 맡았었다. 이 역시 사양을 하다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안동에 머물게 되었다.
 
 
<선비정신이 약?>
 
김병준: 이곳 선비수련원을 다녀가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 같다.
 
김병일: 이사장을 맡은 첫해인 20084천 명이 수련했다. 그러던 것이 20122만 명을 넘었고, 지난해는 75천 명이 되었다. 올해 목표는 10만 명이다.
 
김병준: 이사장이 잘 하신 모양이다.
 
김병일: 그렇지 않다.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시작한 데다 원장 이하 모든 직원들이 성심을 다해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새로 짓고 있는 시설이 완공되면 더 많은 분이 찾을 것이다.
 
김병준: 주로 어떤 내용의 수련을 하나?
 
김병일: 먼저 강의를 통해 선비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도산서원과 퇴계 선생의 묘소 등을 찾아 선비로서의 퇴계 선생의 삶을 느끼게 한다. 이어 '활인심방'(活人心方)이라 하여 몸이 약했던 퇴계 선생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배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수련생 각자 자신의 각오를 다지게 한다.
 
김병준: 선비정신이란 게 요즘의 가치관이나 역동적인 삶과는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김병일: 선비문화 이전에 유교문화에 고칠 것이 많다. 남존여비, 사농공상 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17세기 이후의 잘못된 양반문화 등과 뒤섞여 마치 선비정신이나 선비문화도 잘못된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진정한 선비문화는 그렇지 않다.
 
김병준: 오늘의 삶과 잘 조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김병일: 그렇다. 서구사회는 그 나름의 윤리적 기초 위에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정신이 발달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급격한 변화 속에 모든 것이 다 무너진 상태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개인주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물질주의가 되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되었다. 그 결과 극심한 경쟁과 양극화를 낳고 있다.
 
김병준: 선비문화가 이를 완화시키는 약이 될 수 있다?
 
김병일: 그렇다. 솔선수범과 박기후인의 정신, 또 스스로를 낮추고 남의 입장을 배려하는 선비정신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곳에 지도위원 35명이 있다. 모두 교육계 출신이다. 모두들 섬김의 자세로 스스로 행복해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라 하여 그렇게 되지 못할 리 없다. 자신도 행복해지고 사회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김병준: 끝으로 후배 공무원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김병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 그러나 일을 함에 있어 관점을 어디다 둘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즉 누구를 위해 일할 거냐? 소속 기관도 소속 부처도 아니다. 국가와 국민의 관점에서 일하라. 그 말을 하고 싶다.
 
< 출처 : 매일신문 2016.01.18. >
등록일 : 2016-01-19 09:39     조회: 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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