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사회운동연합

구한말 동학군은 除暴救民, 輔國安民, 그리고 斥倭洋倡義를 내걸고 기병하였다. 고부군수의 가렴주구가 촉발한 봉기였지만 회복불능으로 망가진 조선왕조와 갑자기 험악해진 외세의 위협에 절망한 백성의 선택이었다. 성공하였다면 부패한 정권은 타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斥倭洋의 기치 아래 근대화가 가능했을까? 안중근의사는 부친의 지휘 아래 동학당을 토벌하였다. 동학당의 거사를 당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개화와 자강에 역행하는 망동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고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은 이겼다. 각자 자기 문중 이익만 도모하던 우리의 지도층은 안목과 경륜이 시대착오적이었고 신뢰 상실로 백성의 절망을 지지로 바꿀 수도 없었다. 제국주의의 흐름을 탄 역사의 물결을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갈 힘은 애초에 없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병탄하고 우리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35년을 보냈다. 백 년 전 기미독립운동은 그야말로 삼천만 겨레가 하나로 뭉쳐서 벌인 항쟁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야만적 국제질서는 우리의 절규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똘똘 뭉쳤어도 우리의 힘은 독립 쟁취에는 크게 미흡하였다. 3.1운동 이후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다시 극렬한 반일의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일제를 겪지 않았는데도 소위 6.3세대인 내 평생 처음 느낄 정도로 반일 정서가 드세다. 반일만이 아니다. 미국이 원자탄 투하를 서두르지 않았으면 김원봉의 원대한 계획이 한반도를 우리 힘만으로 수복할 수 있었다는 원망도 나온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피해자와 유족들이 미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지난 백 년 동안 우리가 겪은 고난은 모두 사악한 외세 탓이고 무고한 우리는 자력으로 이 역경을 버텨내고 있다는 식이다.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의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오늘의 분단 한반도는 120여 년 전 동학 혁명 당시 조선과 얼마나 다른가? 사드 보복의 중국과 수출 규제 보복의 일본을 보면 힘을 앞세우는 국제질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때처럼 망국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제는 우리가 맞설 힘과 전략을 갖추어야 한다. 다행히 지난 세기 하반기 산업화에 성공한 우리는 비록 분단 상태이지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혼자서는 주변 4강 누구와도 겨룰 수 없다. 만약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이겼으면 어땠을까? 오늘날 티벳과 신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으면? 블라디보스토크가 부산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맞서지 않았으면 몇 천도 안 되는 광복군이 자력으로 우리 땅에서 일본을 몰아낼 수 있었을까?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 관동군만 수십만이었다고 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흘리신 선열의 피는 마땅히 숭모해야 한다. 특히 기미독립운동이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독립 의지를 각인시킨 것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님들의 노력도 강대국들이 우리의 독립을 그들의 국익처럼 존중하도록 이끄는 데는 크게 미흡하였다. 우리의 독립은 강대국들이 국익을 챙기는 과정에서 반 동강이 분단국가로만 가능하였다. 선열 독립운동가들이 백방으로 뛰셨지만 분하게도 우리는 강대국들의 무자비한 각축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일 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직도 국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 4강 하나하나와 맞설 힘을 갖추기 전에는 현 정세와 4강의 국익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파악하고 우리 이익을 실현하는 외교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에게 굽힐 때는 굽히면서도 필요한 국익을 쟁취하는 것이 외교전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괜한 분란을 일으켜서 어렵게 구축한 동맹마저 와해시키면서 고립의 길로 가고 있다. 지금의 문재인 정부는 백 년 전 동학당과 매우 유사하다. 積弊淸算은 除暴救民이고 대북정책은 斥倭洋倡義다. 집권에 실패한 동학혁명과는 달리 현 정부는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실적을 보면 갑갑할 뿐이다. 적폐청산으로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갔는데 그 자리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보니 과거 행적이나 집무 실적이나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오히려 외교안보와 경제는 국가 근본을 무너뜨리고 있다.  집권으로 자리를 차지한 뒤에 실정만 거듭하면서도 반외세 종족주의를 팔아 재집권에만 열중하는 것은 아닌가? 구한말 자기 문중의 이익만 도모하던 망국 세력과는 다름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100년 전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을 깨달음을 얻었는가?필자소개        이승훈 교수 녹색성장위원회 공동위원장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한국가스공사 사장現 바른사회운동연합 공동대표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아.무.개. 진료 기록 제출 강요”라는 기사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국가 기관의 몰지각한 수준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옛 포도청(捕盜廳)도 아닌데 말입니다. 오래전에 한 대기업 임원으로부터 부하 직원의 건강 문제를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료 후 그 임원은 놀랍게도 필자가 환자와 상담한 내용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마치 무슨 권리라도 있는 듯 말입니다. 그래서 상담 내용을 알고 싶으면 우선 환자에게서 자기 개인 정보를 상사와 공유해도 좋다는 동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임원은 “내 부하 직원이고, 내가 보낸 환자인데…”라며 몹시 불편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의료 정보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개인 정보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권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다른 예가 있습니다.진료실을 찾아온 50대 중년 신사가 있었습니다. 환자의 모습에서 이미 심신이 많이 상한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는 고등학교 교감 임명을 눈앞에 둔 시점에 받은 종합신체검사에서 성병 검사의 하나인 에서 미(微)양성 반응 (+)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 매독(Syphillis) 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아 완치되어, 더 치료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환자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환자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오히려 환자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환자가 군복무시절, 그러니까 30여 년 전 성병에 걸려 ‘페니실린주사’를 맞고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아직도 양성반응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 반응’은 양성, 음성 반응, 즉 혈청 내 병균 유무가 아니라 혈청에 일종의 흉터 자국인 혈청상흔(血淸傷痕, Seronarbe syphilis)이며, 이것이 없어지려면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건강상에 전혀 문제가 없으니 마음을 가볍게 가져도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환자는 슬픔의 그늘에서 벋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털어놓은 그간의 고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의 검사 결과가 교내 구성원 모두에게 알려져 학부모들이 앞장서서, 그를 직장에서 퇴출하려는 운동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알게 되어 등을 돌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문제의 발단은 종합신체검사결과가 직장 총무인사과에 전해졌고, 인사과 소속 일반 직원이 성병 검사에서 양성반응 아닌 양성반응을 ‘공개’한 것입니다. 너무 황당하여 필자도 놀랐습니다. 신체검사결과, 즉 소홀한 개인의료정보 관리의 허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어느 날 총무담당자가 필자에게, “건강하심을 축하합니다.”라고 하기에 “고맙지만, 무슨 말이냐?” “종합건강검진결과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찔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외국의 경우 모든 신체검사결과는 의료 인력에 의해서만 철저하게 관리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가슴이 답답하였고, 지금 다시 생각하여도 그렇습니다.  앞서 선생님이나 필자가 겪었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개인 정보에 대한 관리개념이 매우 희박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서구 사회는 매우 다릅니다. 필자가 독일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며 해부학 실습을 할 때의 일입니다. 수업에 앞서 가장 먼저 실습 시구(屍軀)에 대해 학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경건한 마음가짐을 배웠습니다. 더불어 시구에 대한 정보는 어떤 것이라도 절대 실습실 밖으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시구의 얼굴 인상이 어떠하다는 것조차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함구령이었습니다.그런데 환자를 직접 대하는 임상학 과정에서는 환자의 비밀 준수 관련 지침이 차원을 달리할 만큼 엄격했습니다. 진료 과정에서 보고 들은 사항은 모두 ‘환자의 개인 정보’이므로 절대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는 강도 높은 수련 지침이 선행되었습니다. 환자와 관련한 정보는 병실 밖에서 절대 누설하지 말라며 ‘중국의 세 마리 원숭이(각각 눈과 귀와 입을 막은 원숭이)’ 슬라이드 자료를 보여주던 담당 교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그런데 임상 실습에 즈음해 담당 교수가 언급한 사례는 더욱 강한 메시지를 남기기에, 충분했습니다. 한 산부인과 의사가 친구의 부인을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의사는 진료를 받았던 환자의 남편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습니다. “내 아내가 자네한테 진료를 받았다며? 고마워.” 의사는 별것 아닌 일로 고마워할 것까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물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아니야. 특별한 사항은 없었었으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뭔가 문제가 있어 진료를 받지 않았겠어? 이유가 뭐야?” “작은 염증. 별거 아니야.” “무슨 염증?” “별것 아니래도….” “야, 남편으로서 궁금해서 그래.” “그냥 가벼운 질염(膣炎).” “세균성?” “아니, 작은 이물질에 의한 염증.” “무슨 이물질?” “작은 콘돔 조각 때문에 생긴 이물질 반응이었으니 걱정하지 마.”그날 둘의 대화는 별일 없이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주 후 산부인과 의사는 친구의 부인으로부터 ‘의사의 침묵할 의무를 지키지 않아 남편으로부터 이혼 소송을 당했으니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한다’라는 내용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아내와 성관계를 한 적이 없다면서 불륜을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결국, 의사는 법원이 내린 막대한 배상액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그는 지역 의사회로부터 ‘회원 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조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위의 예에서 보여준 법원의 판결과 해당 지역 의사회가 취한 조치의 공통 핵심 사항은 ‘개인 정보의 유출’에 대한 엄격한 제재입니다. 기원전 약 450년, 지금부터 약 2500년 전 성의(聖醫)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생 결코 밖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거나 들을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모든 것을 비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절대 누설하지 않겠노라.” 개인 의료 정보의 중요성은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지켜온 의사들의 윤리지침이기도 합니다. 아마 서구 문화권에서는 국가 기관인 경찰청이 “아.무.개. 진료 기록 제출 강요”라는 험한 말을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개인 정보’와 관련해 갈 길이 아직 멀었는가 봅니다. 그런 와중에 의사 단체가 ‘개인 의료 정보’를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몰지각한 서울경찰청을 상대로 즉각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하니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의과대학 졸업식장에서 행하여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헛되지 않았다는 흐뭇한 생각을 하며 교육의 의미도 함께 반추해봅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오래전부터 국내 의료계는 한의사들과 크고 작은 분쟁으로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이젠 갈등이 불거져도 짜증스럽거나 덤덤할 뿐입니다. 가끔 의료계의 한 사람으로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 ‘불편함의 중심’에는 이를 관리 또는 통제하기는커녕 이른바 ‘중립성’을 지키기에 급급한 정부 기관이 있습니다. 중립성을 명분으로 손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의료계 분쟁은 모두 정부 기관의 흔들림 없는 지침이 부재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 생각합니다.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의사들이 환자 진료에 ‘X-ray’ 진단기기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한의사가 지켜야할 선을 결국 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가 의학계를 두둔하고 한의사계를 경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필자가 의과대학을 다닐 때인 1960년대에는 유전학 이론을 ‘멘델의 법칙(Mendelian law)’ 수준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멘델의 법칙’은 마치 ‘무인자동차’ 시대의 ‘우마차(牛馬車)’ 같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만큼 현대의학은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르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듯 수십 년간 다양한 관련 서적과 크고 작은 학회에서 끊임없이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즉 입체적 접근으로 공부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X-ray 영상 필름을 보고 ‘판독’한다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절벽’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상 필름을 보고 진단하는 판독은 책을 통해 간단히 익힐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다년간 수행한 ‘눈(眼) 훈련’의 결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자에게조차 다른 사람을 위해 영상 필름을 판독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각종 의과학 관련 서적만 해도 그 변천의 발자취를 따라잡기 힘듭니다. 1960년대에 발행된 각종 주요 의학도서가 10~15번째 증보(增補)판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새로운 학문적 지식을 꾸준히 보완·보충해 다시 새 책으로 나온다는 뜻입니다.이러한 격동적인 발전을 해온 분야 중에는 다름 아닌 ‘방사선 진단기기’가 있습니다. 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방사선 관련 영상 자료(X-ray 필름)를 놓고 어떤 의학적 의견도 언급하는 것을 철저하게 자제해왔는데,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습니다. 의과 대학생으로서, 인턴으로서, 레지던트로서, 의사 초년생로서도 X-선 필름을 판독해 정확한 진단을 유추하는 것은 고도의 ‘눈(眼) 훈련’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X-ray 영상 자료를 보고 판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전문 지식인의 식견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이 문제와 관련해 얼마 전 영상의학과(전 방사선과) 원로교수에게서 들은 말이 퍽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X-ray 영상은 흑백 필름인데, 그 흑백사진 속에서 병리 조직체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영상의학과 전문의의 몫입니다. 그런데 젊은 초년생 전문의가 필름에서 12~14개의 다른 흑백을 구별한다면, 원로 교수는 무려 20여 개의 다른 흑백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진단 영상의학 자료에 대한 정확한 판독은 숙련도에 비례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내과계 환자의 경우, 영상진단을 의뢰한 의료진과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수시로 영상자료를 놓고 의견을 나눌 수 있고, 나눕니다. 이는 의료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료 시스템의 장점입니다. 특히 외과 환자의 경우, 수술 담당자가 영상의학과 전문가와 의견을 나눈 후 수술에 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영상의학 진단이 최종 판정이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전문의들과 복합적인 의견을 통한 입체적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얘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의사가 X-ray 진단기기를 환자 진료에 도입하겠다는 것은 의료 시스템의 체계를 제대로 모르고 낸 발상이 아닌가 싶어 염려스럽습니다. 이는 한의사들의 자존심이나 권익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 소비자인 환자의 권리, 즉 최상의 진료를 받을 환자의 권리를 무엇보다 우선 생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판독 오진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생각하면 의료 윤리적 측면에서도 걱정이 앞섭니다.  영상의학 진단은 매우 숙련된 전문의의 몫이라는 것을 쾌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래 이슈화된 한의사의 영상의학 진단이 과연 누구를 위한 발상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분히 생각하며 우리 사회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여의도에 패스트트랙 어쩌고 하는 이름의 태풍이 불었다.   지금 국회에는 심의도 안한 수만 건의 법률안이 쌓여 있다. 국회선진화법 탓이란다. 세계에 유례없는 고비용저효율이라던 국회에서, 그동안 미적미적 하품만 하고 지내던 식물국회가 갑자기 동물국회로 바뀌었다.  국회란 여당과 야당이 국사를 논하라고 만든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우리나라 與와 野는 끼리끼리 갈라서서, 마주하는 것은 물론 말 섞는 것도 기피하고, 복도에서 만나도 외면하기 일쑤다. 장외에서 막말이나 험담을 주고받을 뿐.    그런 국회에 쇠망치와 빠루가 등장하고 육탄전이 벌어졌다. 동물국회가 되었다. ‘국민들은 몰라도 된다는 법’을 밀어젖히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우리나라 동물국회의 역사는 오랜 전통이 있다. 옛날 전국구 의원 몇 자리는 의례 ‘어깨’에게 배당하여 육탄전의 前衛와 당수 護衛역할을 맡겼었다. 이런 동물국회의 경험은 그 후 대만, 일본, 우크라이나, 터키 등지도 수출되기도 했다.    육탄전을 벌려서라도 국민이익에 부합하는 법을 만든다면 뭘 탓하랴. 그런데 이번에 패스트트랙에 올렸다는 공수처법, 선거법이란 것이 아무리 뒤져봐도 대통령이 제왕이 되고, 여당(衛星여당까지 합쳐서)이 개헌선 의석을 확보하겠다는 꼼수밖에 안 보인다.   야당이야, 당초부터 천덕꾸러기니까 버리고 간들 어떠랴 싶겠지만, 그래도 형식적인 공론화과정이라도 거쳐야하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고 소수의견을 반영해주는 제도이다. 결코 다수결이 독재를 합리화하는 방식이 아니다.   나는 이사회, 위원회 등 수많은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풍경은 거의 보지 못했다. 몇 사람의 이의가 나오면 안건을 보류하거나 좀 더 협의해 오도록 유도하게 마련이다.  조용조용 쟁점을 집어가며 토론하다 보면 길이 보이는 법인데, 언성을 높이고 삿대질을 하고 머릿수를 세다보면, 자기만 옳고 상대방은 전부 틀리게 보인다.   민주주의 함정은 바로 煽動몰이다. 우리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 편 가르기는 내 편을 확실하게 챙기는 방법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항상 네편 내편을 가른다.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 내 편이 느슨해진다. 상대방을 공통의 적으로 찍고 투쟁심을 돋우어야 내 편이 뭉친다.    소위 운동권식으로 내 편끼리 모여 밤새워 어깨동무하고 ‘아침이슬’을 불러보라. 제마다 戰士가 되고 한 팀이 된다. 그래서 실제 현장에서 스크럼 짜고 육탄전이라도 벌리면 모두 장렬하게 玉碎하거나 가미가제(神風)가 되겠다는 식의 戰意가 불타오른다. 투사가 영웅이 되고 팀워크는 더 단단해 진다. 군중심리가 작동하여 감성적으로 동화되고 집단최면상태가 된다.    여 야의 대표들은 상대방과 끝없이 토론하고 타협하고 대화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전장에 나서 나팔 불고 북치며 전의를 끌어올린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협상해서 얻은 것보다 투쟁해서 얻은 것이 더 값지다.  확실한 편 가르기로 내 편 챙기기가 덤으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소수는 무시된다.     다수결이 정의란다. 다수는 정의이고 소수는 악일까? 가령 다수당의 60%가 찬성하지만 야당의 80%가 반대한다면 이 안건은 다수결원칙으로 부결된다. 그런데 ‘당론’으로 묶어 밀어버린다. 예를 들면 바른미래당 12명이 나머지 11명을 포승줄에 묶어 끌고 다니는 형상 아닌가? 다수결이 독재의 틀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당론에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며 육탄전에 앞장선 국회의원의 몰골이다. 국민이 뽑은 지역주민 대표인데 이제는 여당의, 야당의, 권력자의, 대통령의, 당대표의 졸개가 된 모습이 처량하기만 하다.        ‘당론’은 국회의원을 줄 세우는 방법이다. 적폐다. 물론 당론은 윗사람의 뜻이다. 아랫사람들은 거수기가 되고 허수아비가 된다. 비록 같은 당 같은 이념을 갖고 있다 해도 複製인간이 아닌데, 어떻게 사안마다 오차도 없이 똑같이 줄을 서야 하나.   100%란 공포가 지배하는 의회는 독재국가, 전체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당 案에 반대하는 여당의원도 있고, 찬성하는 야당의원도 더러는 있어야 자연스럽지 않은가? 늦었지만 금태섭·조응천의원이 청와대와 다른 의견을 내놓은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끝까지 당론에 반하여 반대쪽에 투표한다면, 아마도 오신환처럼 소모품으로 버려지지 않을까?    당론정치를 하는 한, 국회의원들이 당론에 묶여 끌려 다니는 행태가 반복되는 한, 동물국회는 계속되고 점차 野獸국회로 갈 것이다.   국회의원의 자유투표가 보장된 미국에서는 대통령도 여당의원들에게 법안통과를 위해 로비하는 것이 관례이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파당으로 갈려 몸싸움을 벌릴 이유가 없다.  국회의 전통이 있는 영국국회에는 여당과 야당의석 간에 스워드라인이 있다. 칼싸움을 방지하기 위해 넘어선 안 될 선을 그어놓은 것이다. 또한 의사진행을 방해하거나 언행에 품위를 잃으면 의장 직권으로 빅벤의 종탑에 연금해 놓는다.   국회의원은 지역구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인데, 그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와 투표를 억압하는 것은 위헌이다. 의회에서의 당론정치를 없애서 국회만이라도 ‘지금까지 가 보지 못한 길을’(주1) 가 보자.(주1) 문대통령의 취임사 구절임. 필자소개        이건영 박사(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미국 노스웨스턴대 도시계획학 박사건설부차관국토연구원장교통연구원장중부대 총장단국대 교수

얼마 전, 한국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서울을 찾아온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 교수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Austria) 태생이었기 때문에 언어장벽 없이 필자와 빠르게 대화의 폭을 넓혀가며 이런저런 주제로 환담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 교수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필자에게 “어찌하여 한국은 그리도 빨리 발전할 수 있었느냐?”, “발전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고 물으면서 덧붙입니다. 1960년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빈곤국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말입니다. 필자에게는 그런 ‘묵직한 주제’에 답변하기에는 전문성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상식 수준에서 의견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더니, 그 분야 전문 학자들의 의견은 여러 계기에 강연이나 글(논문)로 익히 알고 있다면서 필자 같은 시민의 견해를 듣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긴장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필자는 ‘그 이유가 교육에 있는 것 같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 시대, 즉 10세기부터 국가가 주관한 과거(科擧)제도 통해 국가공무원인 관리를 뽑았다. 시험 응시 자격은 법적으로는 양인(평민)이면 가능했지만 실제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는 사람은 대부분 귀족이었다. 물론 음서(蔭敍)제도가 있어 왕족, 공신, 5품 이상 귀족의 자제는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고려가 귀족사회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조선 시대에도 관리 등용을 위해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는 고려와 비교하면 한층 강화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 시대처럼 음서나 천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고려에 비교해 크게 줄었고 비록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갔다 해도 문과라는 과거제도의 최종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관으로 승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너도나도’ 출세하려면 ‘공부밖에 없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그것이 우리의 DNA가 된 듯싶다.”라고 설명했습니다.흥미로운 것은 우리네 과거시험과 비슷한 관리 선발 제도가 이웃 나라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이장(里長)급’ 관직까지도 ‘대물림으로 계승되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시대에는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있던 분들이 공직에서 물러나면 대부분 서울을 떠나 낙향(落鄕)하여 고향 근처에 서당(書堂)이나 서원을 세우고 후학 교육에 이바지한 사실입니다.이러한 전통에서인지 필자가 6.25 한국전쟁 중에도 창고 같은 열악한 임시 건물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던 것은 물론, 부산 피난처에서 여러 대학교가 임시캠퍼스를 열었던 것 역시 기억합니다. 또한, 필자가 어렸을 때 ‘재정적 빈곤보다 지적 빈곤을 더 부끄러운 것이다’라고 어른께서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한국의 사회상을 논하면서 교육열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그와 더불어 근래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두 가지 변혁을 덧붙였습니다.하나는 선거철이면 공공연히 오가던 금품거래가 사라졌다. 선거 관련 유권자가 ‘음식 대접’을 받으면, 그 벌(罰)로 대접받은 음식값의 10배 이상 50배까지 ‘토(吐)해내야 한다.’, 물론 입후보자도 제공한 음식값의 수십 배(상한 3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금으로 내야 하는 것과 함께 당선 무효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로 ‘김영란법’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그간 고정화된 듯한 ‘풍성한 선물 오가기’가 늘 마음에 걸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필자가 80, 90년대 선거 때면 공공연히 금품이 오가던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였는지 우울증에 빠지는 건 아닌가가 싶을 만큼 암울했던 기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눈부실 만큼 밝아진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더니, 경청하던 두 교수는 조용히 손뼉을 치며 근래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듣는다며 한국 사회에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회현상을 보면 참으로 실망스럽기도 하고 속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50년 전, 30년 전 우리의 사회상을 되돌아보면, 오늘이 있기 위한 피할 수 없던 습득과정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발전했습니다. 그렇듯이 오늘의 부정적인 모습 역시 앞으로 20년, 50년 후에는 아주 다르게 긍정적으로 변한 모습을 보이리라 굳게 믿게 됩니다. 50년 후 우리의 후손들이 어찌하여 우리 조국은 세계제일의 소강국(小强國)이 된 이유를 외국인에게 설명하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근거 있는 희망입니다.필자소개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최근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4개의 정당이 합의 제출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 (“공수처법”)을 국회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여 통과를 강행할 것으로 보인다.  고위공직자의 직무 관련 부정부패를 엄정하게 처벌하여 이를 근절하는 것은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우리 검찰과 경찰이 그동안 주로 정치적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고위공직자의 비리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고위공직자들의 부패가 심했던 홍콩과 싱가폴은 고위공직자 수사를 전담하는 특별 수사기구를 설치 운영하면서 큰 성과를 보았고, 공직사회의 청렴도를 높여 일류 선진법치국가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필자는 한 때 공수처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한 적이 있다.   공수처법에 의하면, 법적용대상인 고위공직자의 범위에 대통령, 국회의원, 판·검사, 고위행정공무원, 주요시장, 도지사 및 교육감등 선출직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공수처가 기소 할 수 있는 대상은 판사, 검사, 경무관급 이상의 경찰관에 한정되어 있다.  공수처가 설립된다고 하여도 그 운영의 성공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전망이다. 오히려, 옥상옥이 되거나, 정치적으로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대한 탄압과 압력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또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있었던 헌재 재판관과 대법관의 임명의 경우처럼, 공수처의 검사와 수사관에 특정 연구회소속이나 특정변호사단체의 회원 변호사들중에서 임명할 것을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소심위위원회를 둔다 하여도, 현행 여러 위원회의 구성원인 위원들을 코드중심 인사들로 선임하여 편의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실태를 보면, 형식만 갖추었지 실질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공수처 운영 최고 책임자와 수사 책임자들의 독립성과 고도의 직업윤리의 확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고권력자와 정치권에서 공수처에 대한 독립성을 철저하게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독립성의 보장과 고도의 직업윤리 확립이 기대 될 수 없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이 될 수 있다면 참으로 위험한 사정기관을 새로 도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정기관의 역할이나 정치권의 수준에 비추어보면, 공수처의 설치 및 운영에 적합한 현실적 요건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설립목적에 부응하는 역할을 전혀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고위 경찰관과 판·검사들을 부당한 정치적 목적에 악용할 소지가 크다. 현재의 우리 현실에 비추어 공수처는 설치되어서는 안된다.   2019. 5. 2.  바른사회운동연합 상임대표 신 영 무필자소개                            신영무 상임대표     미국 예일대학교 로스쿨 법학 박사 제46대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 환태평양변호사협회 회장 법무법인 세종 설립, 대표변호사 現 S&L 파트너스 대표변호사現 바른사회운동연합 상임대표  

 2월말 트럼프와 김정은의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지도 열흘이 넘었다. 극적인 상황 전개에 언론마다 나름대로 평가와 해설 기사를 내놓았지만,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뾰족한 전망은 찾기 힘들다. 1차 싱가포르 회동 전까지 트럼프는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놀아난 전 정권의 실책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큰 딜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싱가포르 회동이 성사되었고 그 합의문에서는 완전한 비핵화의 문구가 빠졌다. 이어서 70노인이 30대 청년을 존경한다는 등 김정은 찬사를 트윗하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환은 매우 놀라웠다. 대북협력을 원하는 정부와 좌익 진영은 환호하였고 북한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 우익진영은 경악하였다. 미국이 결국 북한이 요구하는 부분적 핵폐기와 제재 완화에 동의하고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할 듯 보였기 때문이다. 놀란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북한을 냉대하던 시진핑도 연이어 김정은과 회동함으로써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미국과 무역전쟁에 온 힘을 쏟는 중국으로서는 행여나 인근 국가 중 자신의 유일한 우방인 북한마저 미국 편으로 전향해 버릴까 경계한 것이다. 1차 회동 이후 상황 전개는 이미 드러난 것과 같다. 누구도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핵보유를 해낸 것은 물론이고 핵능력 일부 감축만으로 제재 해제와 경제 지원을 얻어낼 것이 확실해 보인 김정은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고 서울 한복판에서조차 영웅 위인으로 칭송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는 그 이후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면서 실무 협상을 진행하는 여유를 보였고, 67시간이나 걸린 기차 여행 끝에 2차 회동장소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회동 결과는 그를 포함한 많은 사람의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트럼프의 입장은 뜻밖에도 1차 회동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완전 비핵화 이후 전면적 제재 해제였다.             변덕스러워 보였던 트럼프의 일관성    그동안 있어 온 트럼프의 언동을 되새겨보면 재미있다. 처음에는 김정은을 ‘로켓맨’으로 희화화하다가 1차 회동 이후에는 ‘존경할만한 지도자’, 그리고 ‘좋은 친구’로 바뀐다. 그것이 2차 회동 이후에는 ‘quite a guy, quite a character’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칭찬인지는 분명치 않다. 웜비어 사건을 김정은은 나중에야 알았다고 비호하는 듯 했지만, 덧붙인 말이 ‘그 많은 수용소와 감옥에 감금된 사람을 김정은이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라 파장이 미묘하다. 처음에는 적대하다가 갑자기 이용가치가 생겨서 띄워주고 그 이용가치가 약해지면서 묘사가 달라지는 장사꾼 냄새가 짙다. 북핵에 대해서도 빅딜에 동의만하면 북한의 엄청난 잠재력(tremendous potential)이 활성화되도록 도와준다고 호언한다. 물론 그 도움의 주체는 한국일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이 제안은 햇볕정책을 추진한 김대중 정부 때부터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박론에 이르기까지 우리 측에서 줄곧 제안해 왔던 내용이다. 북한은 우리의 제안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그 어려운 역경을 견뎌낸 끝에 마침내 핵개발에 성공하였다. 이제와서 트럼프의 똑같은 제안에 핵을 포기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아예 개발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트럼프는 입으로는 김정은을 끝없이 칭찬하면서도 제재의 강도는 꾸준히 높여왔다. 1차 회동 합의문에서 완전한 비핵화의 문구를 배제함으로써 김정은의 전통적 살라미 전술이 먹힐 듯한 허점도 보였다. 김정은은 이 기대감에 기대어 2차 회동에서는 영변 핵시설 해체 정도로 제재 완화를 얻어낼 계획이었다. 마침 미국 내 탄핵 분위기 때문에 트럼프가 영변 해체의 성과도 감지덕지할 것으로 믿었을 수도 있다. 2차 회동에 큰 기대를 걸고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면서 점점 더 조여오는 제재를 견뎌왔다. 그런데 회담 중에 자신에게는 시간이 급하다고 실언함으로써 제재 효과가 컸음만 확인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고백을 들은 트럼프의 답은 시간은 많다는 것이었고 결정은 회담장 철수였다. 김정은은 집요하게 전통적 살라미 전술로 부분 비핵화와 제재의 부분 해제를 맞바꾸려고 하였고 트럼프는 허점을 보여 김정은의 기대치를 높이면서도 사실은 계속 CVID를 고수하였다. 그 결과 트럼프는 김정은이 1년여간 별다른 반발 없이 고통스러운 제재의 아픔을 철저히 겪도록 만들었다. 이 아픔을 겪고도 2차 회동에서 결국 좌절당한 김정은이 과연 전처럼 핵활동을 계속할지 아니면 백기를 들지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궁지에 몰린 김정은, 도울 길 없는 남한    그런데 트럼프는 지금 중국과 훨씬 더 중요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신기술시대의 세계 주도권을 두고 벌이는 쟁패전에서 중국경제는 지금 트럼프의 예비적 관세 인상만으로도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싶은 중국이 전처럼 북한 제재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북한을 도와줄지 의문이다. 김정은은 한시가 급하지만, 시간은 많다고 느긋한 트럼프에게는 중국과의 경제전이 북핵문제보다 더 중요하다. 제 발등의 불이 더 급한 시진핑이 북한을 돕겠다고 트럼프를 거스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진핑이 북한 카드를 포기하면서 트럼프의 양보를 얻어내려 할까? 북한이 그동안 큰소리친 대로 미국을 공격한다면 자멸한다. 공격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CVID 요구를 거부하고 미사일 발사 등으로 도발하면 다음 수순은 미국의 북폭일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백기를 들거나 김정은 체제의 붕괴다. 그렇게 되면 핵 철거를 위한 미군의 진주는 불가피하다. 중국은 어떻게 나올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의 대응은 잘 준비되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하노이 회담이 성공하여 대북지원사업이 재개될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준비만 해왔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북미 정상이 직접 만나서 입장을 확인한 만큼 북한은 더이상 최고위층의 의중을 감추는 전술적 모호성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상태의 지속은 대북제재의 강화를 뜻하고 북한은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면 이번에는 우리 경제가 미국의 제재대상으로 될 수도 있다. 프랑스 최대은행 BNP파리바가 이란 제재를 위반하여 90억달러의 벌금을 물고 기타 제재를 받은 것이 불과 5년 전이다. 그런데 최근 개각의 면면을 보면 정부의 기조는 그대로인 듯하여 행여나 비슷한 꼴을 당할까 걱정스럽다. 필자소개                 이승훈 교수   녹색성장위원회 공동위원장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한국가스공사 사장 現 바른사회운동연합 공동대표

반세기 전 어느 날, ‘우월적 지위의 남용’이란 용어를 모르고 살아오던 필자가 그 의미 때문에 황당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필자가 독일 대학에서 교수 자격(Habilitation)을 받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서울에서 명문 의대를 졸업한 후 대학 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은 한 친구에게서 부탁을 받았습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1년간 함께 연구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생활비를 포함해 체류에 따른 모든 경비는 자신이 부담할 것이며, 필자에게 그 어떤 재정적 부담도 안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친구이기에 더욱 믿음직스러웠습니다.오랜만에 옛 친구와 연구실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데, ‘연구 보조 인력’에 그것도 인건비 부담이 없다니 필자로서는 반갑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주임교수를 찾아가 친구 이야기를 했더니, 잘됐다고 하시며 흔쾌히 동의·승낙해주셨습니다. 그 길로 필자는 대학행정처 총무과 담당자를 찾아가 담당 경찰청에서 그의 ‘체류 허가’를 받기 위한 서류를 발급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예상했던 대로 체류에 따른 비용 문제를 물었습니다. 필자는 친구가 자비로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한 사실을 ‘당당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임교수도 동의했다고 걸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담당자의 답변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의외였습니다. 그는 “그건 체류 허가 절차에 필요한 요건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필자는 왜 요건이 안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담당자는 ‘우월적 지위의 횡포’로 해석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월적 지위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개념이라 필자는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그 모습을 눈치챈 담당자가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신청자가 오고 싶어 하는 약점을 이용해 이곳 연구소에서 어떤 재정적 보상도 없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채용’하려는 것은 ‘우월적 지위의 횡포’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필자나 주임교수의 연구비에서 신청자의 생활비를 마련해준다면 문제가 없을 거라는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필자는 어이가 없어 한숨만 나왔습니다. ‘꽉 막힌 공무원’이라더니 그 본보기를 보는가 싶었지요. 주임교수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주임교수는 “아, 그렇겠군” 하면서 주저 없이 자신의 연구비에서 신청자의 체류 생활비를 부담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총무과 담당자에게 보냈습니다. 이후 행정 절차는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우월적 지위’가 갖는 독소(毒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옛날 한 말단 행정 담당자가 필자에게 일깨워준 ‘깨달음’을 되새기면서 말입니다.근래 우리 사회는 곳곳에 만연하는 크고 작은 ‘갑질 현상’으로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우월적 지위의 횡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실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인권(人權)이라는 소박한 시각에서 보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갑질’이 우월적 지위의 횡포를 넘어 인권 유린이라는 생각을 하면 가해자도 사뭇 다른 판단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필자소개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정부의 에너지 전환정책은 미세먼지, 방사능 위험,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하여 석탄과 원자력을 줄이고 그 대신 친환경적 청정에너지 확대를 지향한다. 그런데 어느 한 에너지 사용을 중단하면 그 생산 및 소비 설비가 무용지물이 되고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하려면 그에 적합한 설비를 새로 갖추어야 한다. 에너지전환에는 매우 큰 비용 부담이 따른다.   환경운동가들은 비용이 좀 들더라도 청정에너지 사용 확대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 비용을 부담하는 소비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소비자들도 청정 환경은 원하지만 비용부담을 함께 고려한다. 에너지 전환은 정부가 양쪽의 목소리를 듣고 결정해야 하는 장기과제다. 특히 탈원전을 추진하기 전에 먼저 원전의 위험과 탈원전의 비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많은 공개토론을 거쳐서 국민들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에너지 부문의 신기술 발전도 빠르다. 미국은 노틸러스호 발진 이후 핵잠수함과 핵항공모함을 여러 척 취항 시켜왔지만 방사능 피해의 사례는 보고된 바 없다. 안전한 원자력 이용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원자력 발전 분야에 국제적 비교우위를 구축했다면 안전 문제가 불안하여 버리기보다는 안전 강화연구에서 성취를 이루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앞으로 대북협력에서 북한에 건설할 발전소로는 여러모로 원전이 유망하다. 북한이 해주에 원전을 건설하는데 우리가 월성 원전을 조기 폐쇄한다면 자가당착이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원전을 조기 폐쇄하는 조치는 잘못이다. 기계의 설계수명은 잠정적인 것이다. 가동 중에 한 부품이 망가지면 새 부품으로 교체하면 된다. 이렇게 망가진 부품을 교체해가면서 정상가동하는 한 계속 운행할 수 있다. 오래 가동하여 부품을 모두 교체했더라도 전체 조립체계가 헐거워져서 더 이상 정상가동이 어려울 때 비로소 폐쇄한다.   수리비 조금 들이고 한 동안 더 사용할 수 있는 발전소를 폐쇄하고 새 발전소를 짓는다면 수리비보다 엄청 많은 건설비를 들인다. 이 건설비의 일부만이라도 지역 주민 지원 사업에 보조하면 연장 운행이 가능한 원전을 경제성이 없다고 폐쇄한다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에너지 전환은 이 여러 문제를 함께 고려하여 결정할 일이다. 국민들이 이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여러 비용을 더 부담하더라도 탈원전을 원한다면 그 때 추진하는 것이 옳다.* 관련기사(아래 링크 클릭)-매일경제 "탈원전 후 전기료 얼마나 오를지 국민은 몰라" http://nnews.mk.co.kr/newsRead.php?year=2019&no=101828&sc=30000001&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 필자소개                 이승훈 교수   녹색성장위원회 공동위원장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한국가스공사 사장 現 바른사회운동연합 공동대표

  SOC(사회간접자본)사업의 경우, 정책적 선택을 하기 위해 타당성분석을 시행한다.    SOC 투자는 우선 투자규모가 크다. 몇 천억 또는 조 단위다. 기간도 길어서 몇 년 또는 몇십 년에 걸쳐 재정수요를 필요로 하고, 그 효과는 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효과가 국민전체로 분산되어 그 효과를 계량화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오묘하고 정밀한 타당석분석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공사비가 산출되고 미래의 시설수요를 계산한다. 투자우선순위를 정하고 또 투자최적시기를 판단하고, 나아가 가변적 상황에 따라 그 결과가 얼마나 민감한지를 분석한다.   이같은 분석은 모든 정책결정의 필수과정이다.   이 과정이 대통령 말 한마디로 백지화되었다. 즉각 부총리가 어명을 받들어 무려 23개 사업, 24조원 상당의 지역사업을 예타(예비타당성조사)면제조처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조자룡이 헌 칼 이렇게 휘둘렀을까?  유난히 ‘절차의 정당성’을 강조해 온 이 정부. 시시콜콜한 과정이 복잡하고 성가셨기 때문일까? 내년 총선에 출진할 친문계인사들을 지원하려니 시간이 촉박했을 것이다. 그래도 따질 건 따져야지, 국가재정법체계를 내동댕이친 처사는 막가파식이다.  경기부양을 위한 ‘돈뿌리기’라면 차라리 솔직해지자. 경기가 부진할 땐 늘 善心성 건설투자가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법이니까.   먼저 ‘예타’제도를 살펴보자. 이는 500억 이상의 사업으로 정부재정 300억 이상이 소요되는 대규모사업을 정밀 점검하기 위해 1999년부터 도입된 제도이다. 과거 사업시행부서(가령 국토교통부, 정보통신부 등)의 일탈(?)에 대비해 경제기획원(당시)에서 만든 제도이지만 글자 그대로 ‘예비’다. 약식이다. 조사비용도 정상적 타당성분석에 비해 1/10도 안되고 분석기간도 짧다. 그러나 일단 통과하면 국가예산이 배정된다. 예산이 배정되므로 그 후의 일처리는 속성으로 진행된다.       이번에 발표한 ‘예타(예비타당성분석)면제’사업이 24조원 규모의 사업이다. 엄청난 규모다.  그래도 환경영향평가는 해야한다고 환경장관이 슬그머니 엄포를 놓지만, 원님 떠난 후에 나팔불어 뭐하나.   ‘24조원’이란 것도 얼추 추정이다. 사업을 추진하려는 쪽에서는 투자규모를 낮춰 잡게 마련이다. 실제로 사업화하고 나서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구체적인 투자비는 공사설계도가 대강이라도 나오고, 미래의 시설수요 추정이 이뤄져야 알 수 있다. 이 과정도 통째로 생략되었다.  말하자면 ‘예타’란 투자비를 계산하고 미래수요를 계산하는 과정이 주 업무인데, 이런 과정을 생략한다면 그 사업은 ‘깜깜이’ 투자가 된다.  일반 가정에서도 물건 하나 살 때 소위 ‘가성비’라는 걸 따져본다. 회사에서도 투자결정을 하려면 사안에 대한 정확한 투자비소요와 효과분석, 재무수익율 등이 분석된 후에 결정된다. 하물며 나라살림에서랴.   그래서 타당성분석은 모든 투자결정의 기본이다. 공공사업의 경우는 그 사업으로 인한 국민경제적 편익과 환경영향을 정밀하게 따지고, 필요한 경우 몇 차례 반복하거나 단계별로 나눠서 하기도 한다.   개발연대 초기에는 외국 콘설턴트들의 객관적인 분석이 뒷받침되어야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의 차관을 얻을 수 있었다. 사업추진을 원하는 부서에서는 사업계획서를 안고 예산당국 문전을 기웃거리면, ‘경제기획원’의 젊은 사무관들이 칼같이 무서운 잣대로 SOC사업을 저울질하고 잡도리를 한다. 이때 타당성분석 결과가 바로 칼이고 저울이었다.      이번에 발표한 사업의 상당수는 이미 ‘예타’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거나 타당성이 부족해 보이는 사업들이다. 타당성이 충분하다면 당당히 앞문으로 들어가지 왜 뒷문으로 들어가겠는가. 이제 ‘대통령인증’ 표지가 붙어서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몇 년 공사분이 일괄 처리되었다. 이 때문에 정말로 타당성 높은 사업들이 줄줄이 뒤로 밀릴 것이다.    국가재정에 구멍이 뚫리고, 공공사업추진에 뒷문이 생겼다.   예타면제 사유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 라는 말도 생뚱맞다. 정부는 이번에 발표된 사업들이 지역균형발전에 필요한 사업이란다. 예타 조사 매뉴얼에는 이미 정책성,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평가비중을 60%까지 고려하도록 되어 있다.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공헌도를 증명하면 된다. 아예 경제성 평가항목을 없애야 할까?    ‘균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도시는 대도시답게, 중소도읍은 중소도읍답게 그리고 시골은 시골답게 개발하는 것이 균형발전이다. 시커면 뻘밭에 도시그림을 그려보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그리고 국제공항이 들어서고 첨단산업단지가 만들어져야 균형발전일까? 전국이 ‘똑같이’ 되어야 균형일까? 손바닥만한 국토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탓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균형’이란 구호가 난무하는 것이다.  아마도 24조원을 지방에 나눠주면 제마다 여러 사업들의 경제성을 비교하고 우선순위를 고려하여 더 알차게 쓸 것이다. 지금같은 방식은 지방의 정부예속화만 불러오게 된다.      국가재정은 국민세금이다. 이번에 발표한 면제사업을 보면 전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안한,국가의 ‘눈먼 돈’을 쓰자는 것이다.   타당성을 접어두고 정치권에서 앞서간 사업은 대개 실패했다. 지역숙원사업이란 정치적인 수사로 포장되었지만 대개는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만든 신화다.    나도 몇 번 지역숙원사업이란 것을 타당성분석에 참여한 적이 있다. 대개는 지차체 입장에서 맷칭펀딩를 대기도 못하거나 완공한 후에도 수요가 없어 운영과 유지관리비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양양국제공항, 무안국제공항은 물론 상당수의 철도사업, 경전철사업이 이렇게 실패했다.     자기가 땀흘려 번 돈이라면 이렇게 허투루 쓰지 않을 것이다.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정부. 왜 SOC에까지 정치를 물들이고 붉은 색을 칠하는가? 신 적폐다.  국민들은 눈을 뜨고 줄줄 새는 나랏돈 주머니를 지켜보자.필자소개        이건영 박사(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미국 노스웨스턴대 도시계획학 박사건설부차관국토연구원장교통연구원장중부대 총장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