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바람’, 체육계만의 일이 아니어서
'학폭 바람', 체육계만의 일이 아니어서 필자 :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 •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근래 프로 운동선수들의 옛 학생 시절 ‘폭행 사건’, 이름 하여 ‘학폭(學暴)’이 사회문제로 이슈화되더니 연예계에서도 유사한 폭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동안
우리 사회를 광풍처럼 몰아쳤던 ‘미투’ 사건이 떠오릅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리의 민낯이기에 참담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디 비단 체육계와 연예계뿐이겠습까. 상하관계, 즉 서열이 분명한 국가 기관이나 대기업 또는 건설 현장에서 여러 형태의 폭력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심지어
대학 교육 현장, 특히 ‘도제교육 냄새’가 짙은 대형 병원 내 선후배 의사, 사제 사이에서도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마 전에는 아파트 입주민이 퍼붓는 폭언과 폭행을 감내하지 못한 경비원이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큰 테두리에서 볼 때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종
폭력과 폭행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종적(縱的)인 사고 체계가 있습니다.
폭력과 폭언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1950~1960년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몇 세기 전에도 서구 여러 나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수직적인, 즉
권위적인 사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권’이라는 개념이 사회 조직에 스며들면서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여기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혁명이라는 큰 모멘텀(Momentum)이
있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와중에 나타난 엄청난 출혈의 비극을 숨길 수는 없지만 그 산물이 바로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의 정신입니다.
그 ‘신체의 자유로움과 사람 간 수평적 관계, 그리고 갈등을 넓은 사랑으로 보듬는 정신’이 유럽 대륙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휩쓸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미술 작품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실주의(Realismus)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1854년 작품 만남, 또는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La rencontre, ou “Bonjour Monsieur Courbet”)>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178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혁명이 끝난 1809년 직후, 즉 1819년에 태어난 쿠르베는 35세의
나이에 그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쿠르베는 화제(畫題)를 ‘만남’이라 정하고는, 왠지 성이 안 찼는지 “ou Bonjour Monsieur Courbet”라고 덧붙였습니다.
화폭에서 화가 쿠르베는 머리를 치켜올릴 대로 치켜올립니다. 수
염 또한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 있습니다. 그는 뻣뻣하게 가슴을 마음껏 내민
반면, 화가를 만난 신사는 모자를 벗고 “Bonjour
Monsieur Courbet”라며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수행하던 하인과 개[犬]도 공손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의 장면을 목격한 다른 화가가 화폭에 그걸 옮긴 게 아니라, 쿠베르
자신이 그의 생각을 강도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만큼 프랑스혁명의
‘평등사상’이 당대를 구가(謳歌)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다시 유럽 대륙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아울러 인권 존중 사상이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생활 언어에서 ‘반말 사용’의 축소와 함께 ‘존대어’의
일상화가 폭넓게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 현장인 초·중·고등학교와 군대(軍隊) 내에서
상용 언어에 큰 변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와 독일어에는 ‘당신’이란
존칭형인 ‘Vou’와 ‘Sie’가 있고, ‘너’라는 반말형에는 ‘Tu’와 ‘Du’가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 듯 프랑스와 독일 병영에서 ‘반말 금지령’이 내려집니다. 즉
경어(敬語)가 군의 표준말인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어권에도 ‘귀하’나 ‘당신’의 경어체로 ‘Thy(그대)’가 있었으나 상하 계층 간에 ’당신’이나 ‘너’가 구분 없이 ’You’로 평준화됩니다. 그러나 미국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느
계기에 학생을 꾸짖을 때면, 친숙한 이름 대신 성(姓)을 붙여, ‘홍길동’이라면 ‘길동’이라 하지 않고 ‘Mr.
Hong’이라 부르며 지적합니다. 그만큼 감정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언어 풍토는 독일어권이나 프랑스어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필자가 이처럼 길게 서구의 예를 열거하는 것은 우리 사회도 ‘반말’ 사용에 대한 관습을 바꿔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파트나 직장
생활에서, 또는 병영 생활에서 일어나는 ‘극단적 선택’을 지켜보면 많은 사례가 바로 ‘언어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의 이러한 언어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한 최봉영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인은 극단적인 서열화 속에서 존비어 체계를 빌려서 이루어지는
언어폭력에 시달린다”라고 하였습니다.[최봉영,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2005)]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 관련 정서 및 문화가 ‘인권’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이 시대가 지향하는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는
게 필자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근래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체육계의
‘학폭 바람’은 체육계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근본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언어 관습에서 큰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른사회운동연합 | 2021-02-23 | 조회 1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