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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덕 자문위원, 문화일보와 인터뷰 ‘봉사의 기쁨’으로 황혼 빛내는 ‘신림동 그 사람’
  • 글쓴이관리자
  • 등록일2017-11-20
  • 조회수1283
▲  오윤덕 변호사가 지난 1일 서울 서초동 사랑샘 재단 사무실에서 봉사활동으로 얻는 행복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법조 소외계층 돕는 ‘사랑샘 재단’ 오윤덕 변호사 

50대에 판사생활 그만둔 뒤  
신림동 고시촌에 쉼터 열고  
스스로 “바퀴벌레” 칭하는  
고시생 보듬으며 ‘2막’시작  

나도 6년간 낙방 뒤 합격해  
고시생들의 패배감 잘 알아  
혹여 주눅들까 사진 안남겨  
합격 뒤 주례 부탁 땐 뿌듯 

10년 봉사중 건물 철거 시련  
‘이쯤 했으면 됐다’생각 들 때  
소명이어가자며 아내가 설득  
辯協에 기금 출연 재단 세워  

판사땐 몰랐는데 변호사 되니  
남얘기 잘들어주는 재능 발견  
“법조인들 극소수만 기부 활동  
‘개미군단’ 더 많이 생겼으면”
 


‘전관 변호사’의 천문학적 수임료가 회자되는 서울 서초동 법조단지에서 봉사의 삶으로 인생 2막에 활력을 찾은 변호사가 있다. 서울지법(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출신인 오윤덕(75) 변호사. 그는 2003년 사재를 털어 신림동에서 고시생을 위한 쉼터 ‘사랑샘’을 만든 후 8년간 운영했다. 사랑샘 쉼터 건물이 2011년 철거된 후에는 봉사를 그만둘 법도 한데 건물 보증금 등으로 받은 5억 원을 다시 법조 소외계층을 위해 대한변호사협회에 출연해 사랑샘 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고시생과 소외계층을 넘어 더 도울 이들을 찾고 있다. 
 
변호사들의 무료 법률 서비스가 활발한 요즘과 달리 2000년대 초에는 취약계층을 위한 재능 기부는 물론 신림동 고시생을 위한 지원도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때였다. 그가 봉사의 시작을 고시촌에서 한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만 해도 고시생 쉼터를 만든다고 하니 주변에서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공부하는 청년들을 왜 지원해주나’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전관 변호사가 봉사에 나선다니까 어떤 이들은 ‘나중에 정치 할거냐’고 의심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어느 곳보다 절박감이 느껴지는 곳이 고시촌입니다. 낙방하면 패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중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젊은이도 나오는데 그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들을 챙겨야 하는 건 똑같은 길을 걸었던 저 같은 법조인이었어요.”

법조인들 대다수가 신림동 고시촌을 거쳤지만 다시는 그곳 근처에도 가기 싫어한다. 어떤 변호사는 고시생 생활을 ‘바퀴벌레’와 같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오 변호사는 고시의 승자보다 패자들에게 더 시선이 갔다고 한다. 

“신림동 고시생 생활을 생각하면 다시 가고 싶지 않았죠. 그래도 합격한 후에는 법조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상당한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잖아요. 다른 사람과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봉사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중 가장 잘 아는 곳이 고시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2003년부터 운영했던 사랑샘은 100평 건물에 의자 100석을 갖춘 강연을 위한 공간과 3개의 심리상담실, 차실, 기도·명상실 등으로 꾸며졌다. 그곳에서 그는 잇따른 낙방으로 자살을 생각하던 고시생도 만났고, 고시가 아닌 길을 찾아 떠나기 전 찾아오는 청년들도 만났다. 고시생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명사들을 초청해 강연을 열고 주말에는 함께 등산을 가기도 했다. 사랑샘을 운영할 때부터 그에겐 ‘고시생들의 멘토’나 ‘기부 천사’와 같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오 변호사는 그런 말을 부담스러워했다.

“남을 위해 봉사한다고들 하지만 그 말은 틀린 거예요. 남에게 하나를 주었을 때 생기는 기쁨을 알면 봉사를 포기 못 해요. 75년을 살아보니 제가 하나를 주었다고 해도 결국은 되돌아오게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 번 남을 돕게 되면 계속 그 일을 하게 되고, 그게 행복입니다.”

부장판사 출신이라 젊은 시절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이란 생각과 달리 오 변호사는 대학 재학 중에도 그리고 졸업 후 6년 동안 실패를 맛본 뒤 고시에 합격했다. 시험공부 중간 폐결핵을 앓아 고시를 포기하고 은행에 입사했다가 1년도 안 돼 그만두기도 했다. 

“제가 만약에 실패의 경험 없이 재학 중에 합격했다면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을 못 했을 거예요. 어린 나이에 합격했다면 계속해서 더 높은 곳만 바라보다가 주변 사람들을 돌보지 못했을 수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실패를 알게 해 준 것은 축복이란 생각도 듭니다.”

오 변호사는 수차례 낙방을 해 고시생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시생으로서는 사랑샘에서 강연을 듣는 것이 동정의 대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당시에 일부러 고시생들과 사진을 찍지 않고 인터뷰할 때도 사랑샘 내부 사진 촬영은 반대했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봐야 합니다. 안 그래도 패배감에 휩싸인 고시생들을 외부에 노출시켜 주눅 들게 할 수는 없었어요. 지금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 같이했던 고시생들이 지금은 법조인이 돼 저에게 주례를 부탁할 때면 행복감을 느낍니다.”

오 변호사는 최근 논란이 되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낭인’에 대해서도 법조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로스쿨 취지 중에는 ‘고시 낭인’을 없애기 위한 것도 있고 장점이 상당히 많아요. 하지만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에서 또 다른 낭인들이 나오고 있어요. 젊은 청춘들이 길게 보면 8년 동안 공부한 후에도 로스쿨 졸업을 이력서에 쓰지도 못합니다. 앞으로 로스쿨 졸업 후 취업도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더 늘어날 겁니다. 이 문제에는 저 하나가 아니라 우리 법조인들이 대거 나서야 합니다.”

로스쿨 학생의 모습에서 과거 신림동 고시생의 얼굴이 보이는지 오 변호사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로스쿨 학생은 신림동 고시생처럼 모여 있지 않아 도움을 주기가 힘듭니다. 경쟁을 거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이 과거 고시에 실패한 이들처럼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지 않도록 로스쿨에서도 대책을 내야 합니다.” 

그는 서울지법 민사부 부장판사를 끝으로 1994년 법원을 나와 변호사 개업을 했다. 요즘처럼 ‘전관’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따갑지 않아 눈치 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의 선택은 달랐다. 돈이 되는 피고인을 상대하기보다 구치소 접견을 더 많이 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개업을 하고 보니 돈이 많은 사람보다 일반 형사사건 피고인들이 많이 찾았고 찾아오는 분들은 가리지 않고 다 받았어요. 판사 생활을 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변호사로 그들을 만나니 제가 말을 들어주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어느 때부터는 교도소를 갈 때 휴지 한 롤씩 들고 가서 그 사람들 눈물을 닦아 주는 데 썼습니다.”

2011년 사랑샘 쉼터 건물이 재건축으로 철거됐다. 당시는 로스쿨로 인해 신림동의 고시생 수가 줄기 시작한 때다. 준비 기간까지 해서 10년을 일했으면 그만둘 때도 됐지만 오 변호사는 철거비로 받은 돈을 새로운 재단에 내놓았다. 

“신림동 쉼터가 철거된다는 것을 알고는 ‘이쯤 했으면 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나이도 70에 가까워지는 시기여서 아내와 함께 성지순례나 해외여행이라도 하려고 했고요. 하지만 ‘이미 어려운 이웃들에게 바친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때마침 당시 신영무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만났는데 ‘사회적 약자를 위해 쓰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아내가 ‘우리가 못다 한 소명을 다른 변호사들이 이어가도록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음을 굳히고 대한변협에 기금을 출연해 사랑샘 재단을 만들게 됐습니다.” 

50대 후반부터 신림동에서 고시생을 돌봤고 취약계층 법률 상담을 했던 그가 계속해서 봉사의 열정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6·25전쟁 중에 가족 모두가 제주도로 피란가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제주도는 전쟁 참화를 피해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미군들이 서울의 고아 1600명을 제주도로 피란시켜 줘서 학교에 전쟁고아들이 많았지요. 한 반 정원이 60명일 때 15명 정도는 전쟁고아였어요. 아버지께서 제 친구 중에 특히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친구들은 꼭 명절 때마다 집에 오게 해 밥을 해줬던 기억이 나요. 제가 신림동에서 샘터를 열려고 했을 때 어릴 때 생각이 나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남을 돕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만족감이 들더군요.” 

변호사 이전 20년간의 판사 생활은 어땠는지 물었더니 오 변호사는 ‘능력 부족’이란 말만 수차례 강조했다. 

“다른 판사들을 보면 판결을 빨리 내리는데 저는 계속 의심이 들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 차이를 넘으려고 새로 발령을 받을 때마다 법원 제일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출퇴근 시간을 아끼며 일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되니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재능을 발견하게 됐고 신림동에서는 고시생들의 말을 잘 듣다 보니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부족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서인지 앞만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 변호사가 고시생 쉼터를 만들던 2000년대 초와 다르게 최근에는 법조계 전반에 기부 문화가 많이 발전했지만, 그는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최근에는 여러 법조인이 나서서 기부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법조계에 좀 더 많은 ‘개미군단’이 생겼으면 합니다. 1만 원씩이라도 매달 내면 큰돈이 됩니다. 예전 같지 않게 변호사 시장이 불황이라고 해도 법조 사각지대에는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이날 오 변호사와의 인터뷰 동안 그의 아내 권혜옥 씨가 재단 사무실을 지켰다. 신림동 사랑샘 쉼터부터 서초동 사랑샘 재단까지 10년 넘게 봉사활동을 한 그의 곁에는 항상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생 2막에 시작한 봉사에 아내가 함께한 것은 ‘축복’이라고 표현했다.
 
“판사 생활과 다르게 봉사활동을 한 이후부터는 늘 아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가 변호사 업무를 할 때 사랑샘에서 실무적인 일을 한 것도 아내예요. 고시생 쉼터를 만든 이후에는 대학에서 상담학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며 고시생의 상담을 맡아주기도 하고 주말에는 함께 등산도 다녔습니다. 사랑샘 건물이 헐리고 다시 서초동의 사랑샘 재단에 돈을 내게 된 것도 아내 역할이 컸습니다.”

합격과 불합격으로 삶이 가려지는 신림동, 승소와 패소가 분명한 서초동 법조단지. 오 변호사는 어느 곳보다 냉정한 경쟁이 지배하는 곳을 거쳤지만 따뜻함을 갖고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었다.  

정철순 기자 csjeong110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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