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스승. 1 평생을 이어온 뷔허 교수의 가르침
은퇴하고도 저술 및 강연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원로 교수는 “캠퍼스에서 30년이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호칭 가운데 ‘스승’이라는 호칭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그를 ‘스승님’이라 부를 때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고 뿌듯함이 느껴진다는 이유에서다. 학생들에게 스승이라 불리는 교수들에게도 학창시절에 많은 스승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대학 또 사회에서 만난 수많은 스승들. 스승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교수신문>이 새로 연재하는 코너 「스승의 스승」의 출발점이 된 질문이다. 초상화에서 피부병변을 찾아낸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을 시작으로 5명의 원로 교수가 번갈아 가며 자신을 만든 10명의 스승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師表가 사라져가는 21세기 캠퍼스에 아름다운 울림이 되길.
지금 이 순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강하게 떠오르는 스승님이 계신다. 내 대학 첫 강의인 생화학을 담당한 뷔허(Theodor Bücher, 1914~1997) 교수였다. 그는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갖게 된 두 가지 큰 가르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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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뷔허 교수(1914~1997) |
뷔허 교수의 생화학은 의과대학에서의 첫 강의였기에 그만큼 의미가 깊었고 수업에 임하는 나의 각오도 남달랐다. 생화학을 듣는 유학생들 가운데는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나 노르웨이 등 북유럽 출신이 더러 있었지만 동아시아인은 내가 유일했다. 나는 강의에 집중하기 위해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았고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듣던 동양인인 나를 뷔허 교수는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학기가 끝나고 다음 학기 실습을 위한 시험을 치렀는데 나는 성적이 좋지 않을 것이라 예감했고 실제로 결과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학기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뷔허 교수가 나를 교수실로 불렀다. 뷔허 교수는 당시 생화학과 주임교수로 생화학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휘하에 수십 명의 교수들을 둔 그야말로 황제 같은 존재였다. 그가 부른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며 찾아갔더니 교수님이 대뜸 “자네는 내 강의에 결석도 안 하고 열심히 하던데 왜 성적이 나쁜가?”라고 물었다. “교수님 저는 독일에 온 지 이제 2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열심히 예습과 복습을 하는 데도 교수님의 강의를 70퍼센트 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강의 중, 교수님의 말씀에 학생들이 “와~” 하고 웃지만 저는 그들이 왜 웃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우직하게(stur)하게 공부했다고 생각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서 부끄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이 “자네,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지도 않는 우직하게(stur)’라는 단어도 아는구먼,”이라며 씩 웃더니 내 여름방학 계획을 물으셨다. 나는 “기숙사에 남아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뷔허 교수는 강사인 슈미트(Dr. Schmidt) 박사를 부르더니 “자네 앞으로 3개월 동안 이 학생이 지난 생화학 시간에 배운 걸 복습시키게. 자네가 책임지고 수업 내용을 모두 이해하도록 지도”하라고 지시했다. 3개월 후 다시 시험을 치렀고 나는 무사히 통과했다. 나는 시리아, 이란 등지에서 온 학생들이 학과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고 유급을 거듭하다가 결국 중도에서 의학 공부를 그만두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자칫 나도 그런 상황에 빠질 수 있었지만 뷔허 교수 덕분에 첫 번째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독일에서 교수자격을 획득한 뒤 귀국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 가운데 종종 의학 공부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주변 선생들에게 학생이 공부를 어려워하면 못한다고 탓하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세대 의대에 진학할 정도면 실력 면에서 특출할 테니 선생들이 그들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도록 도와서 탈락하지 않게 지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나를 도와준 뷔허 교수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주변의 많은 학생들이 유급을 거듭하다 중도 탈락하는 걸 보아온 나로서는 공부에 어려움을 느끼는 학생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어려울 때 손 내밀어준 뷔허 교수의 가르침이 결국은 내가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길잡이가 된 셈이다.
1961년 가을 뷔허 교수는 마르부르크대(Marburg)에서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것은 대단한 드문 영예이다. 게다가 자신이 제직하는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 나는 독일에서 2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단 세 명만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걸 보았다. 그런 대단한 분이 단지 한 학기 수강생일 뿐인 나에게 해주신 일이 두고두고 고맙고 놀라웠다. 대가는 역시 아무리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는가 보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뮌헨의대를 졸업하고 프랑크푸르트대, 연세대 의과대에서 가르쳤다.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대 명예총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