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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자문위원, 교수신문- 그 분의 사전엔 '험담'이란 말은 없었다.
  • 글쓴이관리자
  • 등록일2019-03-11
  • 조회수1223
시대의 큰선비, 아주대 김효규 총장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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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김효규(金孝圭, 1917~1999) 전 아주대학교 총장


나는 김효규(金孝圭, 1917~1999) 전 아주대학교 총장을 이 시대의 큰 어른이자 대표적인 선비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분을 처음 뵌 것은 1974년 6월, 그가 연세대 의료원장 겸 부총장으로서 유럽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 당시 유럽에 머물던 연세대 의대 교수 김영명 교수와 몇 명이 나를 직간접적으로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김효규 의료원장과 프랑크푸르트 공항과 본까지 자동차 안에서 두 번 만났다. 그런데 김 의료원장은 공항에서 만났을 때도, 본까지 가는 두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만 할 뿐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 의료원장은 간접화법의 대가였다. 본이 가까워지자 김효규 의료원장은 갑자기 “한국으로 귀국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독일에서 영주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국으로 귀국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갈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노라 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김 의료원장은 “귀국할 생각이 있다니 마침 잘됐네요. 이 박사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로 와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김 의료원장은 그에 덧붙여 “연세대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세운 학교라서 미국의 일방적인 영향 아래 있고 종교적 색채가 강합니다. 그러나 학문은 다양해야 하며 지금은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의 합류가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교수를 추천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무렵, 나는 17년째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교수자격시험(Habilitation)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5년 2월, 나는 교수자격시험에 통과했다. 그래서 연세대에 5월부터 출근하겠다고 알렸다. 그 후 귀국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3월 중순부터 짐을 싸서 배로 실어 보내고 우리는 4월 초에 독일을 떠나 미국을 거쳐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어느 날 나제만 교수는“지금 남베트남의 최북단 미국 해병 기지가 있는 다낭이 함락되어 월맹이 남하하고 있는데 사이공 함락은 시간문제”라며 나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연세대학교와 이미 귀국하기로 약속했으며 지금 이 순간 한국이 전쟁에 휩싸이지 아니한 상황에서, 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리이기에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1975년 5월 1일. 첫 출근을 하려고 대문을 나서는데 “사이공 함락”이라고 대서특필된 호외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놀랐지만,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다. 나는 그렇게 연세대와 인연을 맺고 교수로서 일하게 되었다.

연세대 의대 교수로 근무를 시작한 지 몇 달 후, 김효규 의료원장에게서 점심이나 같이하자는 연락이 왔다. 진료가 끝나고 김효규 의료원장의 차를 타고 북한산 기슭의 조용한 식당으로 갔다. 자리에 앉자 의료원장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라고 물으셨다. 나는 “모릅니다. 무슨 날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이 교수가 우리 학교에서 근무한 지 오늘로 백일이 됩니다. 이제 백일이 되고 보니 마음이 놓이고 해서 같이 식사하자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셨다. 김효규 의료원장님은 그처럼 자상하게 나를 챙기셨다.

그분은 독일에 있던 나를 연세대로 불러 귀국의 단초를 마련해주셨고 이후에도 강남(前 영동)세브란스병원 설립과정을 함께 추진했다. 아주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기신 후엔 나를 아주대 의대학장으로 부르셨다. 내 삶의 주요 순간마다 늘 그분의 부르심이 있었다. 그런 인연을 맺은 덕분에 나는 그분과 가슴에 담아둘 만한 이야기까지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아주대로 부임한 뒤, 김 총장님이 부총장이자 의료원장인 내 방으로 찾아오셔서. “제가 커피 한 잔 마시러 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김 총장은 20년 가까이 만나는 동안 나이 차이가 많은 나에게 단 한 번도 말을 놓거나 예의에 어긋나게 행동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차를 마시고 분위기가 편해지자 김 총장님이 “이 부총장은 다 좋으신데 조금 유(柔)하세요.”라고 흘리듯 말씀하셨다. 그전에도 내가 총장실을 방문했을 때 “이 부총장은 흠잡을 데 없이 좋으신데 유한 게 흠”이라며 농담처럼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건물도 다른 부총장실로 일부러 찾아오셔서 작정한 듯 그 같은 말씀을 하셨다. 김 총장님과 나의 그동안 인연을 생각하면 자유롭고 편하게 이야기할 사이였다.

하지만 나는 정색을 하고 “총장님,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로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유해서 문제가 생긴 적이 있습니까?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걸려도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그 일을 관철합니다. 다만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제 단점이 될 수는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씀드리자 편한 자세로 커피를 마시던 김 총장님은 자세를 고치고 두 손을 모으시더니 고개를 숙이며 “미안합니다.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하셨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별말씀을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살아오면서 그처럼 정중한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다. 무언의 아름다움이었다.

김효규 총장님과 오랜 세월 인연을 맺었지만, 그분이 질이 낮은 이야기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험담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김효규 총장님이 너무나 큰 사람이자, 큰 어른이고 어른 중의 어른인가 하고 생각한다. 그분이야말로 내가 만난 분 중에서 가장 선비다웠다. 그분을 늘 존경하며 마음속에 큰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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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뮌헨의대를 졸업하고 프랑크푸르트대, 연세대 의과대에서 가르쳤다.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대 명예총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출처 : 교수신문]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님의 연재 중 글인 “그 분의 사전엔 '험담'이란 말은 없었다.”란 제하로 <교수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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