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화를 떠올리면 두 가지 단상이 스쳐간다.하나는 필자가 태조의 초상화를 보러 전주시 소재 경기전(慶基殿)에 찾아갔을 때 일이다. 조금은 어두운 전시실에서 어진을 한참 살펴보고 막 나서려는데 작은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안내판에는 “오른쪽 눈썹 위에는 사마귀가 그려져 있어…”라는 글귀가 있었다. ‘초상화’ 하면 으레 안면에 관심을 쏟던 필자는 ‘놓쳤다’는 당혹감 속에 다시 어진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태조 어진의 오른쪽 눈썹 위에 약 0.7~0.8cm 크기의 작은 ‘혹’이 있었다. 놀라움과 흥분이 뒤엉키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사진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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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 어진(御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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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이성계 어진의 이마부위에 작은 Mole(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
태조 어진은 재위 때 제작했다고 하니 약 600여 년 전인 14세기 말~15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당시 상황을 상상해본다.어진 제작은 그해의 가장 중요한 나랏일(國事)일 정도로 큰 이벤트였다. 어진 제작을 위해 초상화의 주인공인 태조 이성계가 포즈를 취했을 테고, 당대 최고의 화원(畵員)이 작업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벤트를 총괄 지휘하는 장관급 감독관이 있었다.
화원은 약 3~5m 거리에서 태조의 용안을 자세히 살펴본 후 초상화를 그렸을 것이다. 이때 화원은 태조의 이마에 주변 피부보다 조금 불거진 작은 ‘혹’, 일명 ‘점[點(Mole), 모반세포성모반(母斑細胞性母斑, Nevuscellnevus)]’을 화폭에 그대로 옮겼다.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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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태조 어진에 묘사된 ‘혹’ 또는 ‘점’ 이라는 병변의 임상 사진. |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말이다. 이를 지켜보는 감독관은 화원이 ‘있는 것’을 그대로 그렸으니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았다. 이윽고 어진이 완성되었을 때, 피사체인 태조 이성계도 본인의 초상화에 그려진 혹을 보고 아무런 질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신하 중 몇몇이 혹과 관련해 부정적 코멘트를 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누구도 어진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고, 태조 어진은 결국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졌다. 이는 미술사적 의미를 넘어 당시의 높은 사회성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또한 태종 10년(1409)에 어진을 모사(模寫)하고, 영조 39년(1763)에 보수 모사했으며, 고종 9년(1872)에 다시 모사했다고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본 전주 경기전 어진이 유일하게 현존하는 어진인데, 이처럼 몇 차례 어진을 모사하면서도 그 ‘혹’을 그대로 두었다는 사실이 예사스럽지 않다. 우리 선조들의 범상치 않은 심성을 엿볼 수 있기에 더욱 자랑스럽고 경외(敬畏)롭기까지 하다.
다른 하나는 201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피부과학회’의 ‘미술을 사랑하는 피부과 교수의 모임’에서 필자가 특별 강연을 맡았을 때 일이다. 당시 필자는 조선 시대의 여러 초상화와 함께 태조 어진에 나타난 이마의 ‘혹’을 청중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청중은 이구동성으로 15세기의 봉건적 암흑시대에 개국 군주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혹’ 같은 ‘흠집’을 그대로 옮겼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립 박수로 선조들의 ‘올곧은 정신’에 경의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는 신화(神話)가 아니라, 조선 시대 518년 내내 면면히 이어온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 기록물인 초상화이기에 그 특별함이 있다. 이러한 민족정기가 우리네 ‘정신 DNA’라는 게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
[출처 : 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1904/wk2019040810392114686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