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가 1961~62년 해외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한국 문화 보물 5000년 전(Meisterwerke Koreanischer Kunst)>이라는 전시가 미국과 유럽에서 열렸습니다. 프랑스 파리를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왔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한국은 낯선 나라였고,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고 찌들대로 찌든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이었습니다. 그런 나라 한국에서 온 문화재라고, 여러 점, 토기 기마상, 반가사유상과 불상, 김홍도, 정선의 그림, 고려청자, 분청자기, 백자 등이 비교적 다양한 문화재가 전시되었습니다.
정작 유럽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1962.3.3.)>은 우리 문화예술 보물 전에 대한 글을 크게 실었습니다. 이는 독일에서 유학할 당시 필자가 접한 고국 관련 기쁜 소식으로 처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필자가 독일에서 충격과도 같은 감동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기차로 약 90분 거리의 프랑크후르트의 ‘우리 전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전시장에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이란 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프랑크푸르트에는 유학생이 고작 몇십 명 정도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전시장을 찾아온 한국인이라며 필자를 많이 반겨주셨던 것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는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와의 각별한 만남 이야기였습니다. 저명한 작가이자 현직 장관인 앙드레 말로가 전시회 마지막 날 찾아와 우리 문화재를 오랜 시간 찬찬히 살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며 그분은 퍽 상기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아픈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파리에서 전시회 개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파리유학생 5~6명이 찾아왔답니다. 그들은 전시장을 휙 둘러보고 나가면서 “이런 옹기 조각들을 무슨 국보라고 가지고 와서 전시하느냐?!”며 핀잔하듯 내뱉고는 훌쩍 떠났다고 합니다. 그분은 우리 유학생들이 너무 거칠고 무례하고 무식하기까지 해서 심기가 많이 불편하셨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그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해줄 기회가 없어 퍽 아쉬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유학생이 ‘옹기(甕器)와 자기(瓷器)’조차 구별 못 한다는 사실에 마음 아팠다면서 말입니다. (註: 옹기는 1,000°C 이하에서 파괴, 자기는 1,300~1,500°C에서 더 경질(硬質).)
그런데 우리 문화 보물전시회가 개막되자 파리 현지 언론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찬사를 쏟아냈다고 합니다. 그들은 특히 조선 분청자기에 매료되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조선 분청자기에서 500년 전의 피카소(Pablo Picasso)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필자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그분은 바로 우리 문화계의 큰 어른이신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선생이었습니다. 《멋모르고 만난 그분, 그가 있었기에 – 최순우를 그리면서》 (진인진, 2017).
돌이켜보면, 파리지앵에게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회화가 그다지 큰 감동으로 다가가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양한 청동금불상(靑銅金佛像)도 그러하지만, 특히 고려청자에 대해서도 우리와는 다른 감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미루어 생각건대, 그네들의 눈높이에는 고려청자가 ‘중국 자기의 한 아류(亞流)’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청자기에 담긴 회화에서 파리지앵은 바로 추상미술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15~17세기의 분청자기에서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분청자기의 회화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삼성 미술박물관 리움’이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전시한 분청자기를 살펴본 한 미술 평론가가 뉴욕타임스에 “수 세기 전 찰흙으로 빚은 그릇이 현대성을 말하다(Vessels of Clay, Centuries Old, That Speak to Modernity)”(2011. 4. 7)라고 극찬하는 기사를 실은 것입니다.
이처럼 파리지앵과 뉴요커가 조선의 분청자기에서 파블로 피카소를 보며 놀라워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 도자에서는 물론 어디에서도 결코 볼 수 없었던 500년 전의 예술성 때문입니다. 실로 세계미술사의 큰 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가 “문화는 문화 소비자가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탁월한 자기를 만들면 무엇하겠습니까? 쓰는 사람이 없으면 만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그런 분청자기를 당시 양반계급이 서슴없이 보듬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자는 당시 사대부들의 높은 예술적 안목을 봅니다. 경외롭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의 분청자기가 다시 한번 유럽 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이근)과 가나문화재단(이사장 김형국)이 힘을 모아 우리 분청자기 100여 점을 2020년 7월부터 4개월간 마이센 도자박물관(Meissen Porzellan Museum)에서 전시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독일 마이센 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마이센은 300여 년 전인 1710년 유럽 도자기가 처음 발원한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그리고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초청을 받아 우리 분청자기가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제 우리 분청자기가 유럽 문화계를 다시 한번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출처 :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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