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경쟁력 높이기
(2022.09.05.세계일보게재)
처음 로마에 갔을 때 만난 신전이나 수도교(水導橋) 유적은 그저 경이로움 자체였다. 서양 토목사의 화려한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이같이 든든한 인프라와 토목기술이 서양문명의 기초였던 것이다. 서양의 역사는 자연과의 어기찬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우리는 자연을 외경의 대상으로 여기고 바람과 물(풍수)을 읊으며 순응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흙과 나무(토목)는 있어도 도시를 다스리는(civil) 기술은 없었다.
런던에 지하철이 뚫리고 뉴욕 앞바다에 홀랜드 터널이 개통될 때, 그리고 독일에 아우토반이 등장할 때, 서울 거리에는 달구지가 다니고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나라의 유통구조는 보부상들의 건각(健脚)에 의존하고 있었다.
로마처럼 아피아가로(街路)를 만들거나 중국처럼 대운하를 뚫거나 네덜란드처럼 바다제방을 쌓는 것 같은 토목의 도전적 역사(役事)는 없었다. 집은 풍수에 따라 낮게 짓도록 하여 서민들은 조가비 같은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니 토목과 건축 기술이 어떠했겠는가?
사정이 이러니 우리의 국토는 금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혀 가공되지 않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우리 반도의 모습이 중국을 향하여 읍(揖)하는 노인의 자세라고 묘사한 구절이 있다. 사대주의의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그 모양이 호랑이 같다고 우긴들 국토의 힘이 세지는가? 어차피 자연 그대로 내버려진 것이 국토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도로인 의주와 한양 간의 사신로(使臣路)는 ‘둘이 걸으면 괜찮지만 셋이 나란히 걸으면 좁은 길’이었다.
지금은 국토와 도시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다. 국토개발사는 고작 반세기. 그동안 경제 규모도 커지고 소득 수준도 높아졌다. 국토를 일구는 산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한때는 건설업이 우리 국내총생산(GDP)의 16% 선까지 차지하고, 전 세계의 크레인 상당수가 한국에서 가동 중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일생활권이라던 국토가 반나절 생활권이 되고, 다시 두세 시간 생활권이 되었다. 계속적인 인프라 투자로 국토의 효율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높인 덕분이다. 이제 작은 국토의 가치가 영국, 독일, 프랑스 국토의 값어치와 맞먹게 되었다. 그렇다고 국토 경쟁력, 국토 위에 사는 우리 삶의 수준이 그렇게 선진화되었을까?
우리의 작은 국토. 지하자원 하나 없는 국토의 틀은 기본 인프라다. 이 국토 위에 세워진 교통, 통신, 에너지, 의료, 물관리, 교육시설 등의 물리적 가치가 생산을 지원하고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땅은 경쟁력을 갖게 된다.
우리는 개발연대 동안 꾸준히 성장의 과실을 인프라 스톡(stock)에 투자하여 왔다. 그러나 인프라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 개발도상국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63개국 중 27위. 기본 인프라의 경쟁력은 도로가 26위, 철도가 20위밖에 안 된다. 대도시 경쟁력 평가도 물론 조사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서울은 늘 20위권 밖에 있다.
구체적 예를 보자. 우리나라 도로 연장은 11만㎞로 일본의 10% 수준이다. 국토 면적을 따져 계산한 국토계수당 도로보급률은 우리나라가 1.5, 영국이 3.4, 일본이 5.5 수준이다(국토교통부 자료). 철도는 어떤가? 철도 연장이 우리나라는 4000㎞, 일본은 2만7000㎞이다. 우리 수도권이 도쿄나 런던 같은 거미줄 전철망을 갖는다면, 수도권의 경쟁력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지난달 폭우 때 나는 문득 파리의 하수도를 관광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영화 ‘레미제라블’에 보면 주인공 장발장이 형사에 쫓겨 하수도로 도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리의 거대한 하수도망은 19세기 중반 오스만(Haussmann) 시장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서울 한복판 강남은 배수시설 미비로 물바다가 된 것이다.
당연히 인프라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매년 인프라 관련 예산은 제자리걸음이다. 박원순 시장, 문재인정부 때는 ‘토목은 적폐’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앞선 정부의 굵직한 국책사업이 비판받고 파헤쳐지고 취소되기도 하였다. 대신 예비타당성검토도 하지 않은 정치성 사업들이 들어섰다.
국토는 단순한 흙이 아니라 생산의 바탕이고 삶의 그릇이다. 그 위에, 그리고 그 밑에 인프라가 깔린다. 우리는 그동안 계속 넘치는 수요에 비해 공급 부족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서둘다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설계도도 없이 공사를 시작하기도 하고, 도시계획도 없이 집 짓는다고 지방을 난개발 천지로 만들고, 급하다고 아무 데나 공장을 지어 폐수를 쏟아내었다. 공사비 줄인다고 멀쩡한 산허리를 자르기도 하고, 앞뒤 재보지 않고 쓸모없는 비행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지금은 공급 부족도 문제이지만 그동안 적당히 만들어놓은 시설의 질 향상과 보수, 그리고 노후화도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작년 초 취임하자마자 ‘미국을 다시 움직이게 하자’며 2조달러 이상의 인프라 예산안을 발표하였다. 영국 등 다른 선진국들도 기존 인프라의 노후화로 그만큼 국가경쟁력이 처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우리 새 정부는 국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투자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인프라는 적폐가 아니라 국력이며 국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