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정보활동의 현실과 과제
국정원 정보활동의 현실과 과제
(24.09._"월간헌정" 9월호 게재)
국정원은 수미 테리 문제를 방관해서는 안된다.
수미 테리는 한미 양국의 안보정책과 우호
관계에 중요한 자산이고 그에 대한 관심은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슴으로 미국을 대하지만
미국은 머리로 우리를 대한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스파이 세계에는 “실패한 스파이는 화려하고 성공한 스파이는 따분하다”는 말이 있다. 체포된 스파이는 화려하게 미화되기도 하지만 성공한 스파이 얘기는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스파이 하면 흔히 제임스 본드의 화려한 액션을 생각하지만 실제 스파이 일은 따분하기 짝이 없다. 공적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공작여건 발굴, 활용대상자의 물색·포섭, 공작계획 작성, 결재 획득, 예산 확보, 지출 증빙서 구비, 감사 수감 등이 업무의 8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7월 미국 법무부 등록 없이 한국을 위해 일했다고 외국대리인 등 독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북한 전문가 수미 테리 사건 보도를 보면 우리 정보요원들은 화려한 스파이도, 따분한 스파이도 아닌 아마추어 스파이, 조롱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 글에서는 수미 테리 사건과 관련된 의문점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허술했던 보안 의식
첫째, 국정원 요원들이 연방수사국(FBI)의 10여 년에 걸친 감시도 눈치채지 못하고 수미 테리를 접촉해 사진이 찍히는 등 허술한 활동을 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하지만 국정원 요원들이 비밀접촉 방식으로 수미 테리와 접촉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외교관 신분인 국정원 직원이 북한전문가와 의견을 나누는 것은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에 보장된 일상적 정보 활동이고 한·미 양국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요즘 선진국에서는 비밀 접촉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1년 현재 전국에 1,600만 대의 CCTV가 설치돼 있고 우리 국민은 하루 200여 회, 5초에 한 번 꼴로 CCTV에 노출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경우 94%의 얼굴 식별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방국에서 통상적인 외교활동을 하면서 비밀접촉 방법을 사용한다면 활동에 큰 제약이 따르고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져 주목대상이 되기 쉽다.
둘째, 국정원 요원이 수미 테리와 함께 명품가게에서 고가품 선물을 구입하고 자기 카드로 결재했다는 점이 특히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정보활동은 기록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 일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엄격한 회계규정을 지켜야 하는 일선 정보관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국정원법 제16조에는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기밀이 요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예산 집행 시 증빙서류를 첨부토록 돼 있고 국정원의 내부감사는 매우 엄격하다. 따라서 국정원 요원으로서는 수미 테리가 선호하는 물품을 선택케 하고 손쉽게 증빙서도 구비하기 위해 이 방법을 선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쁜 업무에 선물 하나를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수미 테리도 북한정보가 필요
셋째, 수미 테리가 국정원 요원과 자주 접촉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공소장에는 국정원 요원들이 일방적으로 수미 테리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돼 있으나 수미 테리는 2011년 CIA 퇴직 후 북한정보를 얻기 위해 국정원 요원과의 접촉이 필요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 전문가로서의 연구활동과 명성유지를 위해서는 국정원의 북한정보가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 수미 테리는 국정원 요원과의 의견교환이 자신은 물론, 한·미 양국을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넷째, 국정원 요원이 국무성 인근 승용차에서 기다렸다가 수미 테리로부터 블링컨 국무장관과의 비공개 면담내용을 전달받은 것도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서로가 접촉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던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나 국정원 요원이 자신의 능력 과시를 위해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섯째, 국정원 요원과 수미 테리가 자신들의 접촉과 활동이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했는지 여부이다. 수미 테리의 의회 및 FBI 증언, FBI가 수미 테리에게 국정원 요원접촉에 대해 경고했다는 점 등에 비춰 수미 테리가 법 위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분명하다. 하지만 국정원 요원이 수미 테리에게 서훈 국정원장과 미국 조야 고위 인사들 과의 대담과 미 의회 보좌관과 국정원 현지 요원들 간의 친교모임(happy hour) 주선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국정원 본부와 미국주재 요원들이 수미 테리의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가능성과 그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국정원과 수미 테리가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문제에 크게 유의하지 않은 것은 1938년 법 제정 이후 2023년까지 기소가 총 14건에 불과하다는 점과, 수미 테리의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내용이 기고 4회, 면담 주선 2회, 행사주선 2회, 비공개 정보 제공 1회 등으로 일반적인 외교활동 범주에 속하고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는 활동이라는 점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미국시민의 혈통 모국을 위한 범죄에 엄격
여섯째, 한·미관계가 매우 좋은 시기에 미국이 자국 이익을 크게 저해하지 않은 이 사건을 기소한 이유도 궁금하다. 미국의 청와대 도청사건 무마를 위한 협상용이라는 등의 추측이 많지만, ①범법사실이 확인되고 증거가 확실한 경우 기소하는 것이 FBI의 업무방식이라는 점, ②미국이 금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외국의 정치개입을 특히 경계하고 있다는 점. ③미국은 미국시민의 혈통 모국을 위한 범죄에 엄격하다는 점, ④수미 테리가 FBI의 경고에도 불구, 법 위반 활동을 계속해 왔다는 점, ⑤언론보도와 홍보효과를 중시하는 FBI가 한국이 우방이고 과거 박동선 사건도 있고 증거가 확실해 홍보 효과가 크다고 생각했을 가능성 등이 수미 테리 기소배경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FBI가 적시한 수미 테리의 위법행위 16건 가운데 뉴욕에서 있었던 행위가 2건에 불과한데 FBI 뉴욕지부가 기소를 담당한 것은 FBI 뉴욕지부가 전통적으로 ‘자체적 권위를 가진 본부’로서 역할을 하는 독립성 강한 지부라는 점에서 외압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정보업무 개선을 위한 개혁이 시급
이번 사건을 보면 미국 법 제도에 대한 인식 부족, 허술한 보안 의식, 미국이 우방국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방심 등 50년 전 박동선 사건과 비슷한 점이 많다. 또 국정원장 2명, 차장급 4명, 본부 국장과 현지 간부들이 해외공작 업무에 경험이 전무했다는 점, 그간의 국정원 개혁이 탈정치에 치중되고 원장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 6개월에 불과해 업무개선을 위한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번 기회에 캠퍼스 모집 확대, 국가정보학 시험의 부활 등 요원모집 방법의 개선, 교과목과 교육내용의 재검토, 정보활동 및 보고체계의 개선, 회계규정의 재정비 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정보실패에 대한 조금 관대한 태도도 필요하다. 정보기관들은 수백 명의 정보요원과 각 정보요원 당 5∼10명의 공작원과 협조자를 운영한다. 거기다 요원의 능력 편차도 있고 돌발변수도 있어 뜻밖의 실수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더러운 일’(dirty work)을 업으로 하는 정보기관은 사기를 먹고 사는 조직이다. 정보실패는 비판 받아 마땅하나 국정원 직원들이 자부심과 사기를 잃지 않도록 배려도 필요하다. 케네디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잘못은 낱낱이 밝혀지지만 잘한 일을 하나도 알려지지 않는다”고 CIA직원들을 위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정원은 수미 테리 문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수미 테리는 한·미 양국의 안보정책과 우호관계에 중요한 자산이고 그에 대한 관심은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30여년 간의 노력 끝에 자국을 위해 일하다가 복역 중이던 미 해군 정보분석관 폴라드를 석방시켰다는 점, 우리 정부의 끈질긴 교섭으로 박동선 기소가 취소됐던 점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박동선 사건 때 많이 회자된 말, “우리는 가슴으로 미국을 대하지만 미국은 머리로 우리를 대한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염돈재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前 국정원 1차장 *前 성균관대 국가전략 대학원장 | 2024-09-26 | 조회 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