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부관참시(剖棺斬屍)’, 이제 그만
독일 유학 시절, 같은 학년에 유난히 빨간 머리에, 피부가 흰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눈에 띄기도 하고, 미모를 갖춘 여학생이었기에, 동기생들의 눈길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 무렵, 한 동기생이 지나가는 말로, “옛날 같으면….” 하며 말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필자가 피부과학 분야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으며, 중세 유럽대륙에서 이런저런 피부질환으로 고생하던 환자들이 화형(火刑)을 당한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마녀사냥’이었습니다. 필자는 당시에 ‘마녀사냥’이 지닌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영향력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무척이나 놀라워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앞의 동기생은 머리 색이 빨간 여학생을 보며 “옛날 같으면 빨강 머리 여인을 마녀로 여겼다.”며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 일을 계기로 ‘마녀사냥’, ‘여론몰이’가 가지는 허구성과 위험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우리 사회가 요즘 ‘마녀사냥’ 같은 여론몰이로 속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친일파 논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필자가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면서, 가장 ‘소름 끼쳤던’ 사실(史實))이 바로 ‘부관참시’에 얽힌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미 이승을 떠난 자의 죄를 물어 묘에서 관(棺)을 꺼내 부수고 시신의 목을 베는 형을 집행한 ‘부관참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울렁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조들의 행적을 한없이 부끄러워하였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필자가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서글펐던 역사의 한 장면이 바로 ‘친일파’가 우리 역사에 분명 존재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란 ‘어른’이 친일파로 변절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필자가 느낀 좌절감은 무척 컸습니다. 삼일절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로 이름을 남긴, 그 ‘민족의 어른’이 변절하였다는 사실에 필자는 가슴 아파했습니다. 또한, 시대를 앞서간 이광수(李光秀, 1892~1950), 윤치호(尹致昊, 1866~1945) 등 ‘소신파 친일파’가 분명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 지난 역사의 시공간을 돌아보면, 삶을 영위하는 양상도 크게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중에서도 인권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사회적 흐름’은 괄목할 만한 변혁을 끌어냈습니다. 필자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파트 관리인에 대한 부당한 ‘갑질 행위’에 대한 시민적 분노 현상이 그렇고, ‘동물 학대’에 대한 시민의 분명한 꾸짖음이 그렇습니다. 1950~60년대에도 그러했을까? 생각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차원을 달리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고 필자는 자부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초선 국회의원’의 첫 공개발언이 그의 지역구에 있는 국립묘지에서 친일파 인사의 묘를 파해내야 한다며 ‘파묘(破墓)’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필자는 ‘현대판 부관참시’가 떠올랐습니다. 근래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친일파 몰이나, 적폐 청산 몰이를 보며 중세기 유럽에 몰아닥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흔적을 남긴 ‘마녀사냥’을 오늘 우리 사회에서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근래 충무공 영정이 친일파 몰이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접하며, 그 저명한 월전 장우성 (月田 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작품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의아해하였습니다. 그간 월전 선생이 그린 초상화에 복장묘사가 고증 차원에서 오류가 있어서일까?, 또는 일본 초상화에서 흔히 보이는 일본풍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왜냐하면, 필자가 조선 시대에 그려진 초상화 5백여 점을 깊이 연구한 사실 (참조: 『조선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눌와, 2018)과 비록 시대를 달리하여 1970년대에 그려진 충무공 영정을 비롯한 여러 인물 초상화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입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월전 선생이 22세, 약관의 나이에 그린 조부의 초상화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월전 선생은 문중 어른 장석인(張錫寅)의 초상을 그리면서 피사인(被寫人)의 안면에 나타난 ‘일광탄력섬유증(日光彈力纖維症, Solar elastosis)’, 작은 혹[點, Mole]을 비롯한 여러 피부 노화 현상을 가식 없이 묘사하였습니다. 바로 조선 시대 초상화에 전해오는 전통 기법과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하며 작품에 남겼습니다. 돌이켜보면, 동서고금 초상화의 핵심요소는 피사인의 안면 묘사에 있습니다. 서양 문화권의 초상화나,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실제보다 미화시킨 흔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화가가 피사인의 얼굴을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화폭에 옮겨 그렸습니다. 그러기에 태조 이성계 (太祖 李成桂, 1335~1408)의 1409년 제작된 초상화에서 이마에 작은 점(點, Mole)을 확인할 수 있듯이 다양한 피부병변을 조선 초상화에서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화풍은 조선 518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바로, 그런 묵직한 초상화기법을 월전 선생의 초상화에서 필자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 화가 석지 채용신 (石芝 蔡龍臣, 1850~1941)에서, 조선 초상화의 전통 기법이 끊겼다고 아쉽게 생각하던 차였기에 더욱 월전 선생의 초상화 작품이 크게 다가왔던 것입니다.그래서, 필자는 지금까지 본 월전 장우성 화백이 남긴 초상화에서 ‘친일파적인 화법’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료에 따르면, “동양화의 장우성 화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맹세하는 답사”라는 한 일간지에 실린 글이 ‘족쇄의 증거’라 합니다. 작가가 작품의 평가로 명예로운 큰 상을 받았는데도 그저 무덤덤할 수 있을까요? 묻고 싶습니다. 수상경력이 없는 자의 한풀이도 아니고….일제하에서 숨을 쉬며 생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시련도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눈높이로 지난 시대에 일어난 일을 해석하며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끼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마녀사냥’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George Santayana, 1863~1952)가 설파한 “그런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았다는, 현장에 없었던 자들의 진술은 역사의 거짓 덩어리이다 (History is a pack of lies about event that never happened told by people who weren’t there).”라는 말이 오늘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지혜를 되새겨 봅니다. 이젠 우리 사회도 ‘적폐 청산’이나, ‘마녀사냥’이나, 현대판 ‘부관참시’인 ‘파묘’와 같은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수준을 넘어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것은 국민이 우리 사회의 품격에 무엇이 걸맞은지 잘 안다는 뜻입니다.필자소개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前 회장,(사)현대미술관회 前 회장(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 2020-07-28 | 조회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