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
창조형 인적자본 형성을 위한 교육혁신
정 운 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Ⅰ
이 글의 목적은 점점 약해져 가는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을 되살리기 위해 교육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제 견해를 피력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전의 모방형 인재 양성 교육이 창조형 인재 양성 교육으로 바뀌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교육은 개인이 잠재능력을 발휘케 해줍니다. 동시에 국가적으로 볼 때 교육은 계층이동을 가능케하고, 국가의 생산성을 결정할 뿐 아니라, 국가의 품격, 즉 국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들 기능은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고, 또 이 글에서 적어도 산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모두 언급되지만 저는 주로 국가의 생산성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려고 합니다. 다른 측면을 모두 명시적으로 다루기에는 아무래도 제 역량에 한계가 있고 또 한국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생산성 향상이 실로 급박한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Ⅱ
한국경제는 196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 8%이상의 고도성장을 구가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말 이후 경제성장률 추세의 급격하고도 지속적인 하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성장률 하락의 근본원인을 인적자본 축적의 효율성 즉 교육 효율성의 급락에서 찾고, 교육개혁을 통한 창조형 인적자본 축적 및 성장동력 회복의 시급성을 경고하는 연구들이 경제성장률이 4%대로 하락하던 2000년대 중후반에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서울대 김세직 교수와 같이 쓴 논문 “미래 성장동력으로서의 창조형 인적자본과 이를 위한 교육개혁” (2007)을 비롯하여 제가 총리 시절 총리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연구보고서 김세직·류근관 외 “성장동력으로서 창조형 인적자본 육성의 필요성”(2011) 등 우리나라 경제문제의 핵심을 ‘창조’와 ‘교육’으로 파악하는 연구들이 이루어졌고, 정부부처 공무원을 포함하여 교육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연구를 접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후 정치인과 언론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 사이에 ‘창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그 결과 13년에는 ‘창조경제’가 대통령의 정치 슬로건으로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의 장기 경제성장률 추세는 2~3%대로 한 단계 더 하락하였고, 앞으로 더욱 추락하여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이 꺼질지도 모를 상황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한 원인은, 창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확산에도, 창조의 핵심이 다른 여러 지엽적인 요소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인적자본, 즉 창조형 인재의 육성에 있으며, 따라서 창조형 인재의 육성을 위한 교육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아직 정치권은 물론 사회전반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됩니다.
Ⅲ
김세직·정운찬 (2007)에서 논한 창조형 인적자본의 개념은 이러합니다. 경제학에서는 지식과 같이 근로자에게 내재된 근로자가 보유한 능력을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 하는데, 인적자본은 기계와 같은 물적자본과 함께 생산을 결정하는 두 가지 생산요소 중 하나입니다. 김세직·정운찬 (2007)은 이러한 인적자본 중 이미 알려진 것들을 베끼고 따라하는 근로자의 능력인 모방형 인적자본과 구별하여, 아직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새로이 생각해 내고 만들어 내는 근로자의 능력을 창조형 인적자본이라 이름하고,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 회복을 위해서 무엇보다 이 창조적 인적자본 축적이 필요함을 논하였습니다.
경제발전 초기, 중기에는 모방형 인적자본의 축적이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과거 이 모방형 인적자본을 효율적으로 축적하여 8% 이상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의 교육, 특히 입시 제도는 학생들이 중고교 때 얼마나 많이 단어, 공식 및 여러 잡다한 지식들을 암기했는지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암기위주 학습과 반복 학습에 능한 학생들을 구분, 선발해 내고 이를 통해 모방 능력을 학생들이 키우도록 촉진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여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모방에 의한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의 많은 부분이 세계일류국가 수준으로 근접하면서 이제는 모방형 인적자본만 갖고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특허 등 지적재산권 보호 장치의 강화로 인해 외국의 최첨단기술은 더 이상 베낄 수도 없는 반면, 후발 개발도상국은 범용기술에 값싼 노동력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추격해오는 상황에서 모방만으로는 더 이상 국제경쟁력과 높은성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모방형 인적자본에 의존하는 경제성장의 한계는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97년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일컬어졌던 금융부문과 기업부문의 여러 취약성도 금융기관이나 기업에서 근무하는 인적자본이 취약했음을 의미하며, 결국 외환위기는 인적자본이 모방형 중심으로 축적되어온 결과 새로운 기술을 찾고 만들어내는 데 한계에 봉착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의 고도성장은 땀(perspiration)에 의한 것이지 영감(inspiration)에 의한 것이 아니라며 일찌감치 1995년에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경고했던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의 지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방형 인적자본 중심의 성장이 그 한계를 드러낸 상황에서, 한국의 성장전략은 창조형 인적자본 축적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좌우할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가의 창조형 인적자본 축적이 스티브 잡스와 같은 소수의 슈퍼스타들을 육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수많은 무명의 창조형 인재를 또한 육성해야 합니다. 누구나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분야에서 조그마하지만 창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그러한 작은 창조적 변화가 모여 한 사람의 천재보다 더 큰 혁신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형 인적자본을 위한 교육은 소수 영재에 집중되는 교육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숨어있는 창의성을 끄집어내어 계발시켜주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또 하나 오해하지 말 것은 모방형 인재가 무용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과거의 성장에 기여했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모방형 인재만으로는 부족하니 창조형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Ⅳ
김세직·정운찬 (2007)은 시대적 요구인 창조형 인적자본 육성을 위한 여러 가지 구체적 교육개혁 방안들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창조형 인적자본 육성을 위한 범국가적, 초당파적 교육개혁 기구의 설치입니다. ‘창의력 향상’ 같은 추상적인 구호수준에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교육개혁 방안을 구체화하고 이러한 방안들을 강력히 추진할 주체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구가 범국가적, 초당파적 차원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교육문제, 교육개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학부모, 학생, 학교들 간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고 정파 간에도 지지하는 견해가 크게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기구는 정권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는 상시기구로 설치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사회적 합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기구는 창조형 인적자본 육성을 위한 여러 가지 교육개혁 방안들을 고안해 내고 면밀한 검토 후 실행에 옮기는 권한까지 가져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기구는 한국사회 특히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그를 위한 교육개혁 방안으로 각급학교에서 학생을 어떻게 뽑아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제시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교육 전반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이 기구를 이끄는 인력은 당연히 스스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보거나 만들어 내본 경험이 있는 창의성을 갖춘 전문가들이어야 합니다.
김세직·정운찬 (2007)이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에 이런 제안을 한 후, 아직 초당파적 교육개혁기구 설치에 대한 논의나 실행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7년간도 우리나라 교육은 정권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누가 교육부 장관이 되느냐에 따라 명확한 철학도 이념도 지향점도 없이 그 때 그 때 이리저리 흔들려 오다가 오히려 퇴보한 것은 아닌지, 그 결과 학생들과 학부모들만 피해를 보아온 것은 아닌지, 아니 나라 전체가 성장률 저하라는 피해를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Ⅴ
김세직·정운찬 (2007)에서는 창조형 인적자본 육성을 위한 구체적 교육개혁 방안의 하나로 특히 창의성과 독창성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향으로 학교교육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먼저, 학생들에게 남의 것을 베끼는 행위는 무익 유해한 것이고 스스로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올 수 있도록 사회 혹은 도덕과목에 창조성의 중요성과 모방의 무익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더해서, 창의성을 키우기에 적합한 교과과정을 개발하고, 창의성이 학생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도록 평가방법을 넣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 방안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어 이를 보고서로 써내게 하는 수업방식인 리서치 수업과 교사 또는 교수의 일방적 지식전달에 의존하지 않고 토론을 통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발표하는 방식의 토론식 수업의 적극적 도입을 제안하였습니다. 이 논문이 발표된 지 7년여가 지난 지금, 리서치 수업과 토론식 수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확산되어 요즈음 이러한 수업을 시도하시는 선생님들, 탐구보고서를 쓰는 학생들, 교내대회를 만들어 이를 장려하는 학교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른 방향으로의 여러 의미 있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아직 우리 초중고의 수업이 크게 바뀌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대학에서의 강의도 아직 교수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전통적 강의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Ⅵ
창조형 인적자본 축적을 위해서는 대학입시제도 또한 이에 맞게 개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에서는 대학입시 제도가 학생들이 초중고에서 무엇을 공부할지, 어떻게 공부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학입시가 독창성, 창의성이 우수한 학생을 가려내는 방향으로 변해야 초중고에서 학생들이 창조형 인적자본을 축적하는 데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학입시제도를 바꾸어야 학생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창조형 인적자본을 축적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을 할 때, 창조성의 기본 중 하나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를 접해서 이를 이해하고 그 문제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풀어내는 능력에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존의 입학시험이나 학생선발이 이미 있는 것을 달달 반복적으로 암기해서 푸는 것, 이미 그 유형을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한 풀이법을 암기해서 푸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입학시험이 한시라도 빨리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입학시험에 ‘창조형 문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전에 학생들이 접해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문제들을 출제하여 학생들이 이를 해결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창조형 문제를 교수, 전문가들이 잘 고안해 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창조성의 기본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사고하고 탐구하고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무엇인가 만들어 보는 데 익숙한 학생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대학입시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가 입학시험에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남과 다르게, 독창적으로 답했는가를 위주로 평가하는 것을 도입해야 합니다.
창조성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독창적으로 어떤 문제에 답하는 것을 넘어서 독창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생각해내는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 입학시험에 ‘질문 문제’를 도입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떠한 글 혹은 상황을 주고, 그 상황에서 어떤 의문이 생기는지를 쓰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창조적 사고를 위해서는 깊은 사고가 필요함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입시에서는 소수의 문제를 내되, 좋은 생각을 해냈다면 답을 쓰는 데 시간제약이 거의 없는 시험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두 문제를 하루 종일 생각하여 풀게 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깊이 생각해서 풀도록 하는 문제를 통하여 사고의 깊이와 독창성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출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방향으로 입시제도가 성공적으로 바뀌면, 사교육의 문제도 많이 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의 모방형 인적자원 중심의 입시제도에서는, 학생들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학교에 가 학교 선생님에게 일방적 주입식 교육을 받고, 방과 후에는 연이어 깊은 밤까지 과외선생님이나 학원선생님에게 다시 일방적 교육을 받습니다. 그것이 현 대학입시제도에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교육 열풍으로 인해 요즘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탐구하는 능력을 키울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입시제도가 스스로 생각하거나 만드는 능력, 창의성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면, 학생들이 스스로 탐구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방과후 학원에서 일방적이고 피동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는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을 확보하려 할 것입니다. 즉, 창조형 인적자본 중심의 교육개혁은 사교육 문제의 완화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입시제도가 사교육을 더욱 번창케 할 것이라고 걱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입니다. 사교육은 이미 포화점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입시제도가 더 많은 사교육 수요를 발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창조형 문제’, ‘열린 문제’, ‘질문 문제’에 답하는 데에 암기식·주입식 사교육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생들에게 스스로 공부하라고 많은 시간을 주게 되면, 스스로 시간 조절을 하는 훈련이 안 된 학생들은 사교육 받으러 가지 않는 방과 후 시간의 많은 부분을 공부하기보다는 노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노는 것이 모방형 인재 양성에는 도움이 안 될지 모르지만, 창조형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좋을 수도 있음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노는 시간이 주어지면, 누구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스스로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열심히 할 것입니다. 스스로 열심히 정열을 갖고 하게 되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더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게 되고 그로부터 창의성이 나올 것입니다.
창조성, 독창성 중심의 입시제도가 제대로 정착되면, 결국 학생과 학부모들도 사교육이 스스로 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데는 무용함을 깨닫고 사교육에 대한 의존을 줄일 것입니다. 모방형 인적자본 중심의 현 입시제도에서는 사교육을 보다 많이 받은 학생이 입시에서 유리할 가능성이 높음을 고려할 때, 창조형 인적자본 중심의 입시제도 개혁은 교육을 통한 계층 간 이동 가능성 증대라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교육제도에서는 경제성장도 사회안정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과도한 사교육에 대한 교정이 필요한 이유는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이유는 과도한 사교육이 학생들이 창조성을 계발할 시간과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국가가 필요로 하는 창조형 인적자본 축적에 심각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입시제도는 학생들이 대학입시에 대비하여 수많은 과목을 계속 외우고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현재의 내신 제도는 학생들이 모든 과목에서 다 잘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도 않고 재능도 없음에도, 내신을 잘 받기 위해 거의 모든 과목에서 학생들이 과외를 하는 실정입니다. 공교육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내신이 오히려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굳이 내신에 반영하자면, 어떤 과목들은 학생들이 몇점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몇 시간 이수했느냐 얼마만큼 성실히 수업에 임했느냐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 다른 과목들은 시험의 난이도도 어렵지 않게 하고 일정 수준에서, 예를 들어 60점에 합격점을 정하고, 이 합격점만 넘으면 합격으로 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운전면허시험 같이 일종의 자격시험, 인증시험 성격을 갖도록 하여 단순 반복 암기를 통한 모방적 지식 저장에 소모되는 시간을 아껴, 독창성과 창의성을 키우는 데에 활용하게끔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논리적 사고력의 기본이 되는 수학과 한국인으로서의 사고와 의사소통의 기본이 되는 국어에 대해서는 학생이 매우 높은 수준을 달성하도록 유도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과목은 입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에 더해 각자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과목을 1~2개 선택하게 하고 이 과목에 대해서는 독창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배양하도록 입시제도가 유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대학시험 과목은 각 대학 각 학과별로 스스로 3~4개를 정하게 하고, 그 중 특히 선택과목의 평가에서는 학생들의 창의성, 독창성에 중점을 두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두가지만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제시한 대입제도는 하나의 예시에 불과합니다. 각 대학은 자율적으로 입시 방법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대학의 발전은 투자를 토양으로 그리고 자율을 공기삼아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학생들은 대학 졸업이후의 목적지가 취업이므로 기업에서 창조형 인재의 선발에 맞추는 변화를 취하면 대학도 거기에 연쇄적으로 따라가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경쟁과 불경기속에서 모방형 인재를 바탕으로 한 한국형 성장모델의 한계 때문에 한국의 기업도 새로운 창조적 인재 선발제를 채택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Ⅶ
김세직·정운찬 (2007)에서는 창의성의 중요성과 베끼기의 해악에 대한 인식전환을 주로 학교교육의 측면에서만 강조하였었습니다. 즉 학생들에게 교육과정을 통해 이를 가르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창조형 인적자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창의성의 중요성과 베끼기의 해악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배우는 단계에 있는 학생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의 모든 분야에 빨리 확산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제도나 관습, 관행 등이 시급히 변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공짜로 생각하는 오랜 관행들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보호하고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에서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인센티브 자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국가는 개개인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그 사람의 재산으로 인정하고 그러한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을 보호, 보장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업에서의 특허입니다. 음악 등에서 표절을 막기 위한 저작권 보호도 그 예입니다. 학계에서는 저널에의 논문 게재가 논문 저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보호해 주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만약 남의 아이디어를 인용 없이 혹은 허락 없이 쓰게 되면 남의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 되어 법적인 제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디어 보호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커다란 경제적 가치와 부를 보장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며, 그 결과 사회 전체적으로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들이 나와 경제 성장을 견인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경제성장 동력의 급격한 저하 등 다양하고 어려운 여러 경제문제들에 봉착해 있고, 이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뛰어난 젊은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문제의 원인들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창의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들의 창의적 연구에 따라 경제성장률이 0.1%만 증가해도 그 경제적 가치는 매년 1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수치에 달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의 젊은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문제에 대한 분석과 연구보다는 한국 경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도 외국의 유명 저널에 게재할 수 있는 연구에 보다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젊은 한국 경제학자들 입장에서 볼 때 외국 저널에 내는 논문들의 경우에는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 만들어낸 자신의 아이디어를 확실히 자기 것으로 보장 받고 학문적 인정까지 받을 수 있는 반면, 한국에 관한 연구는 그러한 보장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점심 한번 사면 다른 사람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인용도 없이 그냥 가져갈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회 전반적인 풍토가 계속 남아 있고, 연구재단들의 연구비 책정액을 보아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학자들의 지적재산권에 대한 존중이나 그 아이디어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보상이나 고려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론인들, 정치인들 그리고 공무원들이 남의 아이디어를 잠깐 새에 무단으로 가져다 자기 것처럼 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한국의 젊은 경제학자들은 그 사회적 가치가 막대할지라도 결국 보호받지 못할 자신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몇 년을 연구에 투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창조형 인적자본 육성을 위해서 중요한 것으로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정에서의 교육, 특히 질문에 대한 부모님의 태도입니다. 창조형 인적자본을 구성하는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인 질문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북돋아주는 가정의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제가 종종 각종 강의에서 언급하는 내용인데,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에게 ‘오늘 학교에서 질문을 몇 개나 했느냐?’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한국 부모들은 자녀에게 ‘오늘 선생님의 질문에 몇 개나 대답했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 정도면 고급질문입니다. 그보다는 ‘오늘 학교에서 몇등 했느냐? 몇점 받았느냐?’가 일반적으로 나오는 질문입니다. 질문은 더 깊이 있는 생각과 더 새로운 생각, 창의적 생각을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모방형 인적자본의 시대에는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답을 외워서 사용하면 되었지만, 창조형 인적자본이 요구되는 시대에는 남보다 한발 앞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정과 학교를 벗어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 생활에서도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창의적인 질문을 던지고 기존의 일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장려하여야 합니다. 매년 10월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즈음이면, 우리 사회는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이웃 일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때마다 부러움과 질시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큰 대학, 큰 기업에 속해 있는 경우보다 작은 대학, 작은 기업에 소속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관료화된 큰 조직에서는 창의적 인재,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실증하는 예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큰 대학과 기업도 일본에 못지않은 경직성을 가진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슘페터가 혁신(innovation)을 ‘창조적 파괴’라고 정의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존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북돋우는 노력이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야 합니다.
Ⅷ
저는 그 동안 교육에 대한 강의를 할 때 창조형 인재를 키우기 위한 환경 조건으로 꼭 강조해온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첫째가 체력입니다. 제가 그 간 여러 기회를 통해 강조했듯이, 튼튼한 체력의 바탕에서만 창의성을 포함한 지적 능력이 원활하게 발휘됩니다.
이런 점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수학학원에, 영어학원에 이리저리 다니느라 운동할 시간이 없는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만이라도 초중고에서 조금이라도 해보고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이삼십년 전 만해도 꽤 많았었는데 요즈음은 그런 학생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 같습니다.
“아동 청소년 생활패턴에 관한 국제비교연구”에 따르면 15-24세 연령의 한국 학생들은 그 또래의 미국 학생에 비해 하루 평균 운동시간이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적 활동 특히 창의성을 위해 체력과 운동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아직 학문적으로 정립된 것은 없지만, 창의적인 인재를 많이 배출해내는 미국이나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체육과 운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랜 동안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교육을 보아도 ‘체육’을 가장 강조하고, ‘덕육’과 ‘지육’은 그 다음입니다. 체력의 바탕에서만 지적 능력이 원활히 축적되고 결국 수월성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에서는 2월의 추운 날씨에도 학생들을 반바지와 반소매 상의만 입힌 채 진흙 위에서 레슬링을 시킨다는 말을 듣고 제가 그 학교 선생님께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 답이 ‘그래야 인재가 나온다, 훌륭한 리더십은 강인한 체력에서 나온다. 19세기 영국의 수상들은 거의 다 이튼 칼리지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기골이 장대했었다,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그들이 만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Ⅸ
창조형 인재를 키우기 위해 조성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교육 환경이 다양성입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과정에서 늘 다양한 구성원들과 함께하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구성원과 함께 지내며, 자신과 다른 세계를 많이 접할수록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 즉 창의성이 더욱 증폭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서울대총장으로 일하던 2005년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했습니다. 전체 학생의 1/3 정도를 지역균형제로 선발하여, 학생들이 서로 전국 각지의 다양한 학생들을 접하고 서로 배우면서 이를 통해 학생들의 창의성을 북돋고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다양할수록 학생들의 간접 경험이 많아지고, 이를 통해 그 동안 생각해오던 것과는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며, 이것이 새로운 생각들로, 더 나아가 창의적인 생각들로 발전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생각들, 창의적인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운 서울대생들이 졸업 후 각계에 진출하여 나라를 창의적인 나라로 탈바꿈 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는 서울대에 한 학생이라도 보내는 고등학교 수가 600여개교정도였으나 지금은 1,000개교에 육박합니다.
이와 함께 계획을 세웠으나 임기가 끝나 아쉽게도 도입을 못하였던 것이 ‘계층균형선발제’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학생과 함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학생들도 선발하여, 부유한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가난한 학생들은 부자의 걱정을 배우면서 각자 새로운 간접경험을 하면 사고의 폭을 넓히고 더 나아가 자신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심정적 이해와 연대의식까지 배울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학들이 인종 균형, 계층균형, 지역균형 등 다양한 선발제도를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들도 다양한 지역과 계층 그리고 다문화가정에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학생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간접 경험을 많이 제공하여, 서로의 창의성을 키워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창의성 조성 환경으로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다양성은 주로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다양화이지, 학교의 다양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다양화란 이름으로 지난 3,40년간 진행된 특목고정책입니다. 외고, 과학고, 자사고, 자율고 등 다양한 이름의 고교들이 정부의 고교 다양화 정책이란 명분으로 등장하였지만, 이들 학교들은 원래 내건 목적과 상관없이 명문대 입시를 최고의 목표로 하는 입시전문 학교라는 점에서 획일화되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이들 각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의 다양성은 급격히 줄어들고 지극히 동질화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이들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과 선행학습에 상당한 경제적 투자를 해야 하고 진학 후에는 일반고에 비해 훨씬 비싼 학비를 부담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이들 학교 학생들은 경제력이 앞선 가정의 자녀들 중심으로 구성이 되고 그 결과 이들 학교 학생들의 구성은 다양화보다는 획일화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창조형 인적자본을 육성해야하는 시대적 사명 앞에, 이러한 특수목적 고등학교들은 원래의 설립목적에 맞게 운영하는 동시에 학생들은 다양하게 뽑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Ⅹ
그러면 평준화된 일반 고등학교는 어떻습니까? 수재와 범용한 학생이 똑같이 교육받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은 우수함을 추구해야하나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쉽게만 가르치려 하고 평준화를 목표로 합니다.
평준화는 30년 전 자라나는 새싹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킨다고 먼저 중학교 입시를 없애고, 3년 후에 고등학교 입시까지 없앤 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입시지옥은 과거보다 훨씬 긴 터널로 변했고 그 강도 또한 훨씬 높아졌습니다. 한국의 표준적 어린이가 대학, 특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유치원부터 14년 준비를 해야합니다. 이들은 빈부를 가릴 것 없이, 능력도 따질 것 없이 태권도, 수영, 미술, 피아노, 붓글씨, 속셈, 영어 등을 마구잡이로 배웁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꼭 배우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이 끝나면 부모가 거주하는 학군 중심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배정받아 10여 과목을 배웁니다. 대입시에서의 내신을 의식하며 모든 과목을 다 하자니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능이건 내신이건 모두 덜 틀리기 경쟁만 하므로 자기계발 할 인센티브도 생기지 않습니다. 또한 우등생과 지진아가 같은 학급에서 배우자니 애로가 많습니다. 우등생 중심으로 하면 열등생이 못따라오고, 열등생 중심으로 하면 우등생이 흥미를 잃습니다. 결국 학교는 교육을 포기하고 학부모들은 과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평준화된 교실에서 창의적 인간을 길러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평준화는 수재를 바보로 만들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가정의 자녀만이 과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학습능력은 비슷한 학생들끼리 모여서, 반면에 가정환경은 다양한 학생들이 어울려서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창조형 인적자원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Ⅺ
창의성 개발을 위해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교과과목 간 균형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잘 배워야 할 과목 중 하나로 수학을 생각합니다. 수학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존 로크는 오래전에 ‘산술(算術)은 추상적 추론(reasoning)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어서 아주 일찍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산술은 생활과 실무의 모든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쓰는 것이므로 이것을 모르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산술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아무리 완전하게 하려고 노력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로크의 이 말에서 산술 또는 계산을 수학으로 바꿔놓으면 수학의 중요성을 현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학은 기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에 다소 어렵더라도 모든 학생들이 꼭 익혀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수학교육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학이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인식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이미 고등학교 과정의 수학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물론 초등학생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고 아울러 수학이 너무 재미있어서 스스로 부모님께 요청하여 그런 공부를 하는 초등학생의 경우라면 말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특목고 입학과 명문대 입학 경쟁에서 남들보다 몇 발 앞서 출발하려고 부모들이 경쟁적으로 학원에 보내 수학선행학습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한국에서 가계의 사교육비 지출 유발 과목 1위인 수학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쓸데없이 어렵기만 한 시험과 과도한 학습 내용을 강요하여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과 선행학습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우리 학생들은 초중고 12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수학 공부에 쓰고 있습니다. 과도한 선행학습과 함께, 수능의 고득점을 위한 문제풀이 중심의 학습으로 개념과 원리는 충분히 알지 못한 채 평생 거의 써먹지도 않을 쓸 데 없는 문제들의 반복 풀이에 우리 청소년들이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미국 유학을 가보니, 미국 학생들은 계산과 연산문제풀이는 서툴러도 사고력을 요하는 높은 수준의 수학은 굉장히 잘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한반복적, 기계적 문제풀이 위주 수학에서 계산은 서툴러도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수학 교육으로 변모해야 합니다.
한국에서의 수학에 대한 적정수준 이상의 투자와 잘못된 맹신은 한국 대학의 경제학과 학생들과 나아가 교수들 사이에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경제학자인 케인즈(J.M.Keynes)는 과도한 수학적 기법의 사용 없이도 경제가 직면한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훌륭히 제시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수학이 경제학에 도입되면서 여러 가지 편리성과 ‘아름다움' 때문에 경제학의 중요한 분석언어로 이용되었고, 수학이 경제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리화 경향이 과도해지면 경제학이 현실감각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케인즈 이후 경제학을 개척한 많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수학을 이용하여 논문을 쓰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위대한 연구업적은 대부분 케인즈와 같이 그들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직관에 의한 것이지 수학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교과과목 구성에서도 수학처럼 특정 과목에만 치우쳐서는 안 되고 여러 교과과목 간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학 공부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느라 체육도 안하고 운동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 현재 우리의 교육제도는 편식이 영양 불균형을 가져오듯 창조형 인적자본 형성의 불균형을 가져올 것입니다.
수학에 더해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꼭 가르쳐야 할까요? 저는 바로 언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모국어는 도목수가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연장통과도 같습니다. 언어에 대한 지식이 깊고 넓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명료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명료한 사고는 설득력 있는 추론을 가능케 해주며, 추론이 모여 사상체계를 형성하고, 사상체계가 모여서 마침내 하나의 문화가 이룩됩니다. 활력 있고 수준 높은 문화 없이 창조적 인재를 키우기는 어렵습니다. 언어에 대한 숙련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학교 졸업 이후에도 평생동안 읽고, 말하고, 써야 합니다.
그러면 모국어 즉 한국어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저는 한글전용보다는 한글·한자 병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의 어문은 한자를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어휘의 원천이 한자이기 때문입니다. 한자어를 한글로 쓰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한글만 쓰는 한국어는 명료한 사고, 설득력 있는 추론, 그것이 모인 사상체계, 또 그것이 모여서 이룩되는 문화발전에 저해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어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영어열풍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좋지만 국어도 잘하고 영어를 잘하는 것은 몰라도 국어는 못하면서 영어만 잘하는 것은 쉽지도 않으려니와 그렇게 된들 무엇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많은 대학에서 영어로 하는 강의의 비중을 일정 퍼센트로 목표한다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철학을 영어로 소통하겠습니까? 심지어는 국사나 국문학조차도 영어로 강의하는 대학도 있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영어 잘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지만 더 잘해야 하는 것은 국어입니다.
꼭 가르쳐야 할 과목 하나만 더 보태자면 과학기술입니다. 현대는 과학기술의 시대입니다. 과학기술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뀝니다.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집니다. 따라서 수학과 국어 다음으로 꼭 가르쳐야 할 것은 과학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Ⅻ
저는 이 글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이제까지 한국 교육개혁의 핵심 과제인 창조형 인적자본 육성의 필요성과 그 방안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더불어 끝으로 한국 교육에서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교육은 계층 간 이동을 촉진하여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만, 현재 우리의 교육제도는 오히려 소득과 부의 양극화를 고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과거처럼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들 말합니다. 지금은 부모 심지어는 조부모의 경제력 격차에 따라 자녀들의 대학입학 확률이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 결과 부모 또는 조부모의 경제력 격차가 자녀들의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자녀들의 소득 격차로 이어져, 결국 경제력 격차가 대물림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이에 따른 계층이동성 저하는 결국 경제 성장 동력까지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외국인들은 한국을 ‘Dynamic Korea’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이 가진 역동성을 칭찬하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더 이상 Dynamic Korea라는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 원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계층의 수직이동을 가능케 하던 교육이 오히려 계층구조를 고착화시키고 나아가 대물림까지 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창조형 인적 자본 육성을 위한 교육개혁을 통해 저성장 늪에서의 탈출(지속성장)과 양극화 해소(동반성장)라는 두 가지 시급한 경제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창조형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개혁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많은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으고, 국민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를 얻어서 반드시 실행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보다 더 풍요롭고, 누구나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는 사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참고문헌 등 : 첨부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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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05 교육개혁심포지엄 자료집(앞).pdf141205 교육개혁심포지엄 자료집(뒤).pdf